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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Apr 25. 2024

이때라도 도망칠 걸 그랬다

 1998년 3월, 설렘과 흥분은커녕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된 듯한 기분으로 대학의 입학식에 참석했다. 내가 살던 지방에는 오래된 전문대가 있었는데, 그 대학의 간호과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무려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는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지만, 전혀 뿌듯하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뿌듯해 하는 건 내 부모님 뿐이었다.

 아버지는 딸의 진로를 간호사로 정하기가 무섭게, 딸이 지원할 대학까지 다 알아보고 정해 버렸다. 4년제 대학의 간호학과가 아닌, 등록금이 저렴하고 빨리 졸업해서 취업할 수 있는 전문대학의 3년제 간호과를 골라 원서를 사다 쥐어 주는 아버지에게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빨리 이 모든 상황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아버지가 사다 준 원서를 쓰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의 도장을 받았다. 왜 갑자기 간호학과냐, 그리고 4년제 간호학과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데 왜 전문대만 고집하냐, 담임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선생님들이 얼르고 달랬지만, 아버지가 무조건 여기만 가래요, 저도 돌아 버리겠어요, 아니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서를 접수하고 면접을 보러 다니고, 두 학교의 합격통지를 받았다. 아버지는 두 학교 중 학비가 더 저렴하고 집에서 가까워서 자취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을 선택했고, 그렇게 나는 아버지가 선택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비록 전문대학이지만 서울에 소재했고 자대병원이 있는 대학 대신, 지방의 대학을 선택한 덕분에 아버지는 첫 학기 등록금을 굳혔고 딸이 3년 내내 장학금을 타다 줄 거라는 단꿈에(헛꿈이었지만) 젖을 수 있었다.

 간호과의 정원이 무려 200명이나 되는지라, 세 클래스로 나뉘어 같은 클래스끼리 생활하고 강의도 듣게 되었다. 첫날은 각 클래스별로 모여 클래스의 대표도 뽑고 자기소개도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자신의 이름과 간호과에 오게 된  계기를 말하는 형식으로 자기소개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IMF 때문에 왔다.' '부모님께서 취업 잘 되니까 가라고 해서 왔다.'라고 이야기를 하니, 자기소개가 거듭될수록 분위기는 점점 침울해졌다.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 왔다는 친구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간호과의 시간표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내가 수강신청을 하지도 않았는데 일주일에 4일은 8교시, 1일은 그나마 6교시로 꽉꽉 찬 시간표가 클래스별로 배부되었다. 공강? 주 4파? 그런 용어는 간호과에서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전공서적도 무거워 죽겠는데 따로 제본된 강의록이 계속 배부되었고, 학기 초부터 쪽지시험과 리포트와 발표의 향연이 펼쳐졌다. IMF사태가 일어난 지 4개월밖에 안되어 전국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는 분위기인 데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숨차게 오전강의를 듣고 나면 한 시간도 못 쉬고 또 오후 강의를 들어야 하다 보니,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도시락을 싸 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이 한 강의실에서 아침 9시부터 오전 내내 함께 강의를 듣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잠깐 양치하고 와서 또 오후 내내 강의를 듣다가 강의실을 빠져나가니, 내가 대학에 온 게 아니라 고등학교에 재입학을 한 것만 같았다. 대학생활의 재미를 느낄 새도 없었고, 해부학도 생리학도 약리학도 다 재미없고 어렵기만 했다. 그냥, 사는 게 다 재미없었다.

 그나마 내가 대학생이 맞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친구들과 술을 먹을 때뿐이었다. 술집에 이렇게 맘 놓고 출입할 수 있다니, 같이 떡볶이 먹고 햄버거 먹던 친구들과 술을 먹다니, 나 고등학생 아니라 대학생 맞네. 커다란 백팩에 전공서적과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해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이론들을 하루종일 뇌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쪽지시험과 리포트에 시달리자니 내가 다시 고3 된 줄 알았지. 술 먹을 때만큼은 내가 진짜 대학생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나의 재미없고 의미 없는 삶에 대해 잊을 수가 있었다. 술을 먹고 떠들고, 술을 먹고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먹고 울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음주가무에 맛을 들였다. 덕분에, 딸내미가 3년 내내 착실하게 장학금을 받아올 거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보기 좋게 날려 버릴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그렇게 나의 간호과에서의 첫 해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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