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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의사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음, 하며 옅은 신음을 내기도 했다. 마동은 종이를 뚫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같은 목소리로 증상을 심도 있게 이야기했고 의사는 진지하게 들었다.
“일단 감기증상처럼 보입니다. 사람마다 감기증상은 다릅니다. 그 사람 그 사람에 따라서 감기바이러스가 다르게 반응하는데요. 일단 하루분의 약을 지어드릴 테니 바로 하나 드시고 저녁에 또 드시고 내일 아침에 아무런 효과가 없으면 다시 와주세요.”
“그런데 감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차트에 영어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길게 휘갈겨 적었다. 아마도 감기증상이라고 쓰고 약을 처방했을 것이다.
“네?” 마동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와닿지 않았다.
감기증상인데 감기가 아닐 수 도 있다? 이건 무슨 의미가 담긴 말일까.
“혹시 ‘1984’를 읽어 보셨습니까?” 의사는 차트를 간호사에게 넘기며 마동에게 물었다.
“네, 대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학점 때문에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마동은 조지오웰의 1984를 떠올려보았다. 오전에도 회사에서 브리핑을 할 때 사상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다고 딴생각을 했었다. 교양수업의 교수는 사뮈엘 베케트와 스티븐 킹을 서로 섞어 놓은 얼굴을 하고 표정은 항상 심각했다. 대학생들이 현실적인 스펙을 쌓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강한, 강단 있는 성향의 교수였다. 그나마 1학년 학생들의 수업에나 전공과목사이에 교양과목이 있을 뿐이었다. 2학년부터는 전공과목으로 하루를 다 보내야 하는 게 사회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선택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병원의 의사 입에서 1984를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늘 생각 외의 일들이 일어난다.
“조지오웰은 삼십 년 전에 미래에 대해서 죽어가면서 소설을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미래를 마치 예언자처럼 맞췄습니다. 소설 속에는 구어(이전부터 있던 언어체계)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과거의 모든 문학은 사라져 버린다. 셰익스피어나 밀턴, 바이런 같은 대작가들의 작품은 신어(빅브라더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체계)로만 남게 된다. 그 작품들은 단지 언어상의 변화를 넘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그러니까 완전히 반하는 모습으로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자유라는 개념이 사라진다. 그 소설 속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 양상이라는 게 완전히 바뀌게 된다. 사고의 부재를 몰고 온다. 즉, 생각의 필요성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 속의 세상은 당이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를 현재에 맞게 바꾸는 겁니다.”
마동은 의사의 말을 들으며 1984의 내용을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도대체 의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어를 파괴하는 겁니다. 많은 단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거죠. 단어를 많이 사용해서 말을 하면 그만큼 당에 반하는 프롤 들이 많이 나타나는 겁니다. 서로 감시를 하며 당에 복종하려 하고 그 생활이 온전한 생활인 것처럼 느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맛없는 음식과 단체 식당에서만 식사가 가능하고 옆 사람의 팔꿈치가 닿을 듯 좁은 테이블과 때가 껴 있는 머그잔, 끈적이는 양말, 한 번도 작동한 적이 없는 승강기, 꺼칠한 비누와 얼음처럼 차가운 수돗물에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세뇌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면 분명 기억은 그런 생활 이전에 그렇지 않았다는 생활을 기억해 내는 겁니다. 혹시 이 부분이 기억나십니까?” 의사는 신뢰감이 드는 목소리로 볼펜을 왼손에 쥔 채 마동에게 말했다.
마동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건축 학부였지만 교양과목에 구멍이 나면 장학금을 놓치게 된다. 대학교 때 마동의 생활은 혼자서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해야 하는 숙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미래의 생활과 취업을 생각해서 건축전공을 택했지만 현실은 마동과 거리가 먼 분야였다. 마동은 건축역사나 건축 디자인에는 관심이 많았다. 르꼬르비지에의 건축양식을 좋아했고 안도 다다오의 실내양식을 사랑했다. 아르누보에 빠져서 관련된 서적을 보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세계의 건축물과 그 역사를 공부하는 건 좋았지만 현실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머리를 두드려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되었다.
아스콘 양의 체크나 단면도에서 벽면을 채우는 마감재나 시멘트의 배분을 계산하거나 구조역학 따위는 마동에게는 멀리 있는 오로라와 같은 것이었다. 가까이 가려해도 도저히 갈 수 없는 세계였다. 지극히 현실적인 설계에 대해서는 고개를 숙여버리게 되었다. 현실에 부적합한 인간이었다. 마치 고흐처럼. 덕분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