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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트메시지: 소피, 낮엔 미친 듯이 졸음이 몰려오지만 밤에는 불면으로 보내는 거야. 불면이라는 것이 너무 생생하고 끔찍해. 한겨울에 살얼음이 낀 개울가에 발을 담그는 것처럼 말이야. 어쩐지 근육도 낮 동안은 쪼그라들어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텐션이 가해지며 되살아나는 느낌이야. 아니,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야. 신체도 변이라고 있어. 어때? 이야기를 들이니 굉장하지?
디렉트메시지: 그래, 동양의 친구, 당신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놀라움이야. 당신은 이제 당신의 몸을 추스르는데 전념하라고. 내일이 밝아 왔을 때 어떤 변이로 고통을 받을지 모르니 말이야. 중요한 건 다 잘 될 거라는 거야 친구.
마동은 소피에게 고맙다고 했다.
디렉트메시지: 동양의 친구. 나 말이야 포르노 박람회가 다음 주에 한국에서 열리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나를 만나면 좋은 곳으로 안내해줘야 해. 당신은 어서 커피를 들도록 하라구. 난 일을 하러 가야 하니까. 동양의 멋진 친구가 잠들기 전에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구. 갓블레슈.
마동은 소피가 나간 트위터의 화면을 보며 멍하게 앉아 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휴대전화의 액정은 소피가 빠져나가고 더 이상의 생명의 빛이 보이지 않는 무생물이 되었다. 마동은 메마른 입안으로 껄끄러운 맛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가 입안으로 들어와 혀와 목이 색칠하지 않는 마분지처럼 더욱 말라 버리는 것 같았다. 소피가 트위터에서 사라지고 가져온 부재는 마동에게 몇 개의 상념을 가지고 왔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또 다른 자아는 마동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점점 복잡해졌다.
마동 자신이 아닌 몇 개의 상념 속에서도 이명이 들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글자글한 소리다. 어떤 존재들이 수면 위로 입을 내밀고 언어라고 할 수 없는 잡음을 끝없이 내뱉었다. 가까이 가도 그 소리가 명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상념 속에서 삶과 다른 삶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른 삶이란 아무래도 삶을 끝냈을 때 나타나는 삶이다. 상념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다가 살아있는 의지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마동은 작은 나뭇잎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카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비를 피해 들어와서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죽여가고 있었다. 의미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앞으로 나가는 시간에 대항하는 길은 의미 없이 시간을 죽여가는 길이라는 것을 터득해 버렸다. 그렇게 보였다. 비는 이제 거세게 쏟아지지 않았다. 카페밖에는 사람들이 우산 없이 걸어 다녔고 등을 굽히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오려 하는데 40대 여직원이 남은 커피와 케이크를 캐리어에 담아 주었다. 마동은 고맙다고 하며 그것을 건네받아서 집으로 왔다.
비는 흩날렸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조퇴를 하기 전 사무실에서 천장이 빙빙 돌아갈 정도로 어지러운 가운데 디자이너들에게 꿈리모델링 단계별 레이어 작업들을 개체 량에 맞게 지시를 했다. 이 작업이 마무리가 되려면 최소한 한 달이 걸린다. 디자이너들은 각자 도맡은 일은 우수한 메커니즘처럼 잘 처리하는 편이었고 그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단순히 레이어에 대한 작업 실력을 보자면 리모델링 디자이너 각자는 마동의 실력을 훨씬 웃돌았다.
마동은 집으로 와서 샤워기의 물을 틀어서 물줄기의 흐름을 느꼈다. 되도록 숨을 참아가며 샤워를 했다. 여름의 오후는 긴 실타래처럼 길었다. 마동의 얼굴을 욕실의 거울을 통해 보면서 소피와 분홍간호사의 말을 상기해 보았다. 어쨌든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카를 융이 살아있다면 아마도 경쟁이 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에 3차 대전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무의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읽었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손바닥으로 받았다. 물은 마동의 손바닥 위에 떨어져서 바닥으로 흘러 내려갔다. 샤워기에서 나온 수돗물에서는 숨을 쉴 때마다 화학 약품 냄새가 진동했다. 손바닥을 오므려 홈을 만들고 그 홈에 수돗물을 받았다.
그러자 물은 하나의 형상처럼 보였고 물이 지니고 있는 분자의 에테르가 와닿아 손바닥으로 느껴졌다. 물이 지니는 점성과 물의 흐름이 손바닥을 통해서 느껴졌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이 전해주는 에너지는 살아 있었다. 물은 바람과 비슷하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바람에 비해 물의 존재는 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그 존재의 소중함을 배척하며 지내기 일쑤다. 마동은 손바닥을 펼쳐 떨어지는 물을 느꼈다. 물이 떨어져 손바닥에 닿는다.
그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또 다른 에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동은 긴 시간 동안 샤워를 했다. 비누칠도 하지 않았고 몸을 문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다시 한번 욕조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이 들었다. 수도세가 많이 나오면 집주인은 좋아하지 않았다. 독신자들이 사는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서 월세가 낮았고 그에 따라 수도세나 전기요금은 적게 나와야 한다는 게 집주인의 항변이었다. 전기세나 수도세는 쓴 만큼 사는 사람이 내는 것인데 어째서 집주인이 수도세까지 간섭하며 히스테릭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라 발렌샤 얀시엔과 교접 후 좁은 공간 속에서 혼자인 시간이 되면 습관적으로 사라 발렌샤 얀시엔의 가슴골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면 어김없이 페니스가 반응을 했다. 뜬금없지만 사라 발렌샤 얀시엔과 함께 발기부전 치료센터를 운영한다면 자본이 금방 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라 발렌샤 얀시엔을 다시 한번 만나야 한다. 그러고 싶지만 사라 발렌샤 얀시엔이라는 존재를 마동은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