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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없어. 내 고등학교 시절 그 부분이 삽으로 파낸 듯 크고 검은 구멍이 그 자리에 있어.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도 희미한 기억만 있어. 공백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메우고 있어. 아마도 나는 점점 변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변이는 누구나 하고 있어요.”
“그런 의미의 변이가 아니야. 제대로 설명하기가 힘들어. 모래시계와 비슷해.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래시계가 아니라는 거야. 모래시계를 누군가 뒤집어 놓지. 그러면 모래가 아래로 떨어져. 알기 쉽게 한쪽에 색연필로 표시를 해두는 거야.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이 아래에 있지. 그리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으로 모래가 떨어져. 모래가 다 떨어지고 나면 모래시계는 움직이지 않아.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위로 올라가 있고 모래가 알아서 밑으로 떨어지고 있어.”
마동은 잠시 쉬었다. 설명이 적당한지 생각을 했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의 변이는 기차에서 갑자기 비행기로 트랜스폼 하는 변화가 아니야.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처럼 인간에서 벌레로 변이 되는 것도 아니지. 그런 것과는 다르게 변이하고 있어. 는개가 말하는 변이는 대부분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또는 살아가기 위해서 변이 하는 것이지만 나는 죽음으로 다가가기 위해서 변이 한다고 말할 수 있어. 는개는 이해하지 못해.”
“전 이해가 돼요.”
는개는 마동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머리는 물기를 아직 머금고 있었다. 마동의 티셔츠인 브이네크라인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가슴골도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목은 잘 빚은 도자기의 입구처럼 가늘고 도도해 보였다.
“세미나의 담력시험에서 나는 어둠을 목격했어. 우리가 밤이 도래하면 흔히 보는 어둠이 아니었어. 그것은 암흑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질척거렸고 끈적이는 어둠이었어. 어둠에 손을 내밀면 어둠은 손을 짚어삼켜버리고 다시는 내주지 않을 어둠 말이야. 그런데 어둠 속에서 더 검은 어둠이 나오는 모습을 나는 봤어. 그때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군. 나는 꽤 무서운 장면을 여러 번 목격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평소에 무섭다고 느껴지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어둠은 너무 무섭더군. 우리 조의 사람들은 결국 그 어둠에게 영혼을 내줬던 거야. 일단 영혼을 주고 나면 무섭다는 감정도 사라지게 되지. 그렇게 되면 삶이 훨씬 단순해질 수 있어. 내가 지금 멀쩡한 건 내 안에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또 다른 마음이 외부의 지배적인 어둠을 방어해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이번에는 는개가 마동의 손을 잡았다. 번갈아가면서 마동과 는개는 서로 손을 잡았다.
“난 그 흉가에서 어둠이 내미는 빵을 먹지 않았거든. 그것 역시 언어로 설명을 할 수가 없어. 어둠은 우리에게 빵을 내밀었지. 빵은 대단한 유혹이었어. 생존에 관한 유혹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는 대부분 굉장한 공복감을 지니고 있었거든. 그 공복감이라는 거대하고 깊고 무지막지한 허기로 가득 차 있어서 어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어.” 틈을 만들었다. 마동의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틈으로 빠져 들어갔다. 잠깐의 침묵 역시 틈새로 스며들어갔다. 마동은 지금 자신이 조리 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는개에게 이런 식으로라도 말을 해야 했다.
“실은 앞으로 곧 이곳이, 이 세계가 그렇게 깜깜한 암흑의 세상이 될 거야. 나는 알고 있어. 눈을 감으면 이곳이 암흑의 천지로 변하는 모습이 보여. 나 말이야 사실은 무서워. 는개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정말 무섭다구.”
마동이 이야기를 중단하니 방금 전과 다른 침묵이 거실 벽과 공간에 존재했다. 침묵은 으레 손을 귀에 대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했다. 침묵의 옆에는 고요가 혼재했고 그들을 방해하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맨하탄스의 노래는 끊어졌다. 들리지 않았다. 도마접시 위의 횟감도 와인 잔도 와인 병도 테이블도 의자도 전혀 소리라는 것이 없었다. 아파트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를 침묵과 고요가 잡아먹었다.
“고등학교의 어느 날 나는 골목에서 사고를 당했다고 들었어. 그리고 병원에서 옮겨졌고 깨어났을 때 기억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어. 내 기억의 범위가 이만큼이면(여기서 여기 까지라며 한 손으로만 표시를 했다. 한 손은 는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느 부분을 칼로 잘라 놓은 케이크처럼 단면적이야. 사라진 기억의 면이 매끌매끌하고 차가워. 손끝으로 만지면 손에 상처가 날 것 같아서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해.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그 먼 곳의 마을까지 갔는지, 그 골목길을 찾아갔는지 모호하기만 해.
그 사실을 지금 는개에게 처음 들었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나를 그 골목에서 데리고 왔다는 사람이 없었어. 그저 어딘가에서 실려 왔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의사도 어머니도 그 누구도 나에게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기억이 흐르는 물 같지 않아. 그저 끊어진 액체처럼 단면적일 뿐이야. 공허하게 비어있는 부분이 눈에 보인다고.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몸에 멍이 들어 있었고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있었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