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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6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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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파제의 썰물이 밀려 나가듯이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기억 속에서 얼굴에 짜장면의 짜장을 묻혀가면서 먹었던 기억도, 지금처럼 이렇게 초코 가루를 얼굴에 묻혀 가면서 먹었던 기억도, 그리고 그녀와 맞이한 생일에 케이크를 자르면서 얼굴에 묻혔던 추억도 가물가물 했다.


머리가 잊으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얼굴에 묻는 티라미스 초코 가루를 털어 냈다. 하지만 잘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세게 얼굴을 털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가 웃었다. 작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나는 처음 보았다. 역시 어린아이였다.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은서가 보였다. 거짓 없는 웃음.


“레몬트리예요.”


“뭐?”


“레몬트리라구요. 몰라요?”


“그게 뭐니?”


“아이참, 아까 아저씨가 무슨 노래를 듣고 있냐고 물었잖아요. 레몬트리를 듣고 있어요.”


“팝송 말이니?”


아이는 벤치에 차려진 음식을 맛있게도 먹었다.


“너 팝송을 듣니?”


“요즘은 다 들어요. 그리고 좀 있으면 학교에서 영어로 노래 부르기 대회가 있어요. 그때 이 노래를 부를 거예요”라며 여자아이는 한쪽 이어폰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풀스 가든의 레몬트리가 3분의 1 지점에서 흘러나왔다. 쿵짝쿵짝. 달랑 이 노래 하나를 부르고 풀스 가든은 없어져버렸다. 하지만 레몬트리는 그동안 잘도 살아남아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머핀을 먹으면서도 노래가 나오니 잘 따라 불렀다. 발음도 꽤 좋았다. 시대가 이렇게 흘렀다니.


“넌 몇 살이니?”


“아저씨, 숙녀의 나이를 그렇게 막, 함부로 물어보고 그러는 건 실례예요.”


오물오물.


작은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머핀을 파먹고 있었다. 작은 머핀인데도 그녀가 쥐고 있으니 큰 빵처럼 보였다. 아이는 작은 머핀을 일회용 투명 포크로 파먹고 있었는데 좀 어설펐다. 머핀의 반은 흘리고 반만 입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난생처음 머핀을 파먹어 보는 것 같았다.


“너 그런데, 머핀이나 조각케잌을 아주 오랜만에 먹어보는 모양이구나”라며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나는 건물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은서는 점심을 먹었을까.


아침에 그녀가 씻으러 욕실에 들어간 사이 나는 은서가 밤에 왜 면도기를 찾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면도기를 찾는 이유는 알았지만 그것을 왜 굳이 하려는지 몰랐다. 나는 이메일을 확인하려 노트북을 열었다가 은서가 검색한 사이트를 보게 되었다.


밤에, 은서가 일회용 면도기가 어디 있냐고, 혹시 구입해 놓은 것이 있냐고 물어본 것이 떠올랐다. 곰곰이 생각을 해봐도 소극적이었던 은서가 유산된 아이 때문인지, 그것으로 인해 변질된 생활 때문인지 은서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심정의 변화가 바닷가의 해무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이라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저씨, 제 나이를 말하면 아저씬 아마 놀랄 거예요. 그리고 저 이거 처음 먹어봐요. 너무 맛있어요. 집에서는 이런 거 못 먹게 하거든요. 후후. 그리고(우물우물) 아저씨, 제발 멍하게 다른 생각 좀 하지 마세요. 완전히 넋 나간 사람처럼. 지금 손에 있는 커피를 비스듬히 들고 있어서 흐르는지도 몰랐죠?”


나는 커피를 올바르게 들고 있지 않아서 조금씩 줄줄 새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커피는 컵에서 빠져나와 바지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 미안하구나. 이제 다른 생각은 안 할게. 아저씨가 요즘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러니까 꼬마숙녀가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나이가 몇 살인데 아저씨가 놀랄 정도니? 게다가 처음 먹어본다니? 정말이야? 재미있구나, 너.” 나 역시 웃음을 띠었다.


“아저씨 저 되게 조그맣죠? 마치 유치원생처럼. 저 그런데 13살이에요. 하하.”


작은 아이가 말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가 중학생이 여자의 알몸을 처음 봤을 때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작은 꼬마 아이는 누가 봐도 이제 7살이나 6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흠.”


나는 내가 이 작은 그녀를 잘못 들어선 세계에 데리고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심장이 뛰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그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요. 저도 조심해서 매일매일 생활하니까요. 한 번쯤은 먹어도 상관없이 않겠어요? 매일매일 병원에 가고 매일매일 약을 먹고 매일매일 독이 아닌 음식을 먹으니까요. 이제 독이라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사라져 버리는 게 맞지 않겠어요?” 라며 작은 그녀는 고구마라테를 반쯤 비워버렸다.


제비가 날아서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땅 위를 아슬아슬하게 부딪힐 듯하면서 날았다.


제비? 라니?


제비는 이제 없어져버린 철새인 줄 알았다. 오래전에는 제비가 이 도시의 곳곳에 많았지만 몇 해 전부터 제비라는 조류는, 적어도 나의 눈에는 띄지 않았다. 제비가 하늘을 활공하는 모습을 보니 기시감이 밀려왔다. 코끝을 간질이는 이 느낌을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었다.


“7살의 인생을 살아가는 13살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아요.”


나지막하게 말하는 작은 그녀에게서 슬픔이 보였다.


은서는 점심을 먹었을까.


점심시간이 되었어도 건물에서 은서는 나오지 않았다. 몇 명의 성인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고 들어갔다. 그 틈에 은서의 모습은 없었다. 단과학원에서 그들끼리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일까. 나는 은서가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선 것이 내내 걸렸다.


점심은 무엇으로 먹었을까.


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을 집으로 가면서 사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은서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은서가 좋아하는 음식은 중학교 때 배운 투 부정사의 형용사적 용법처럼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기억의 문제가 아니었다. 은서는 그동안 나와 지내면서 내 위주로 식사를 해왔던 것이다. 은서는 먹지 못하는 음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잘 먹었으며 음식에 있어서 집요함은 요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배고픔도 잘 참았다. 닭볶음탕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은서가 도전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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