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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8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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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 13살이라구요. 요즘 13살이면 생리가 시작되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축하받을만한 나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전 아닌 거죠. 벗어났어요.”


작은 그녀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안타까움이 고개 숙인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안타까움이라는 것이 너무 작았지만 칼자국 같아서 흉터가 쉽게 옅어지지 않았다.


“전 13살 틈에 끼지 못해요. 7살 틈에도 끼지 못하죠. 다른 아이들처럼 오래도록 뛰어 놓지도 못해요. 제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놀이가 책이었어요. 의사 선생님도 책을 권장해 줬어요. 동화책부터 아빠가 권하는 책까지 전부.”


아이는 잠시 틈을 두었다.


“하지만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아주 많이 읽은 동화책은 ‘프란다스의 개’였어요. 그 책은 읽을수록 모순이 가득하다고 자꾸 느꼈어요. 어른들은 착하게 살라고 하지만 착하게 사는 게 과연 어떤 이데올로기일까요? 프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와 파트라슈, 그리고 할아버지는 모두 착하지만 전부 죽고 말아요. 죽지 말아야 할 시기에 죽어 버리는 거예요. 행복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아요.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루벤스의 그림도 보지 못하고 도둑놈으로 몰려 얼어 죽어 버리는 네로의 이야기를 보면서 뭔가 이상했어요. 아저씨는 착하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이라 생각해요?”


아이는 한 번에 많은 말을 내뱉었는지 다시 한번 틈을 두었다. 나는 그런 아이의 말을 기다렸다.


“제 마음속에는 친구들과 놀고픈 마음이 강했나 봐요. 어느 날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의사 선생님 뒤편에 꽂혀있는 두꺼운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게 아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같은 책이었을 거예요. 만약 인간의 심층심리를 조금 잘 안다면, 내속의 갈망하는 마음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뀔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비정상적이게 많이 읽어 버렸어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과 대화를 할 때 빼고는 다른 사람과는 이런 이야기는 당연하지만 하지 않아요. 절 너무 이상한 아이로 보거든요. 남과 다르면 사람들은 겁을 내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아저씨는 왜 그런지 편하네요. 아저씨도 꼭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요. 꿈이 때문에 화가 났지만 말이에요. 후훗.”


누구에게나 각각의 사정이란 게 있다. 그 사정을 타인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입 밖으로 이해하고 있어.라고 말을 하지만 이해하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작은 소녀의 마음을 이해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바닷가에서 아직 차가운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작은아이와 손을 잡고 밀려오는 차가운 바다의 파도가 발목 위로 올라오는 느낌을 같이 느끼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럼 넌 아저씨가 어떻게 해야 봉인된 기억의 상자를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저씨, 그건 저도 모르죠. 전 의사가 아니니까요. 원인은 알지만 해명이나 결과 따위는 알지 못해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후훗.”


작은 그녀는 남아있는 녹차 시폰 케이크를 전부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너무나 작은 손으로 나에게 케이크를 나눠 주었다.


“아저씨, 아저씨의 고민은 알겠지만요 너무 저만 먹는 것 같아요. 누가 본다면 저 정말 돼지라고 욕하겠어요. 아빠는 제가 너무 안 먹는다고 언제나 걱정이고 잔소리를 하시는데 말이에요.”


나는 작은 그녀가 건네준 케이크를 받아서 입안으로 넣었다.


나만의 심층심리를 관리하는 건 뇌의 일정 부분이군.


작은 그녀와 나는 사들고 온 스타벅스의 음식을 먹으며 대통합적인 세계를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천식환자의 기침 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자동차 한 대가 벤치 앞 도로에 정차를 했다. 비상등을 깜빡이며 우리 앞에 섰다. 조수석의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운전석의 운전하는 사람의 모습은 꽤 나이가 많은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노인이라고 해도 될 법했다. 자동차도 90년대 초 모델은 소나타 시리즈 1, 2세대 중 하나였다. 자동차는 말년 천식환자의 소리를 내며 멈춰 서더니 누군가를 기다렸다.


뒤 범퍼의 칠이 많이 벗겨져있고 타이어의 홈은 이미 생명을 다 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 작은 그녀가 일어나서 옷을 털더니 처음에 만났을 때의 무표정으로 돌아가서 천식환자의 기침소리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 창문을 내리고 작은 그녀는 나에게 눈길을 한 번 주었다. 오래된 소나타는 다시 한번 쿠당탕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자리를 떠났다.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소나타가 떠나고 나니 정적이 잠시 동안 감돌았다. 이 세계에는 천식환자의 소리를 내는 소나타와 하이브리드 소나타가 공존하는 곳이다. 기이한 세계다.


나는 은서와의 기억에 대해서 다시 한번 떠올리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드물게 하얀색 아키다 견을 데리고 나온 20대 여성이 산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키다 견이 코를 킁킁 거리며 내가 앉은 벤치 쪽으로 왔다가 주인이 이끄는 줄에 끌려 다시 산책길로 갔다.


바람이 불어와서 얼굴을 건드렸다. 바람이 선형으로 불어와 내가 앉아있는 벤치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얼굴의 열린 구멍으로 모두 들어왔다. 바람 속에는 미세하지만 먼지도 들어있었다.


먼지……. 먼지…….


먼지는 어디에나 있다.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에든 먼지는 꾸준하게 있어왔다. 은서 역시 그랬다. 나의 옆에서 또는 내 뒤에서 은서는 그림자처럼 나와 늘 함께했다. 은서는 먼지 같은 존재였다. 나의 곁에서 늘 먼지처럼 함께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서 공원 바닥의 무게감이 없는 나뭇잎들을 이리저리 옮겨주었다. 건물을 쳐다보았다. 은서는 저 안에 있다. 점심을 먹었는지, 어떠한 마음의 자세인지 나는 알지 못한 채 은서는 힘겨운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것이다. 작은 그녀와 헤어질 때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나를 책망했다.


시간이 흘렀다.


시계를 보았다. 3시 30분으로 향해간다. 작은 그녀가 집으로 간지도 벌써 40분이나 지났다. 바람을 느끼며 앉아있는데 천식환자의 요란한 기침소리가 다시 들렸다. 작은 그녀를 데리고 갔던 오래된 소나타가 내가 앉아있는 벤치의 앞 도로에 다시 나타났다. 운전석으로 노인에 가까운 그 나이 많은 중년의 남자가 내렸다.


비상등은 켜 둔 채로.


깜빡깜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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