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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9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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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좀 앉아도 되겠소?” 남자는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낯빛이 그 또래의 남자들에 비해서 좋았다. 긴팔의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옷 속에 드러나는 탄탄한 몸도 눈에 들어왔다. 나이에 비해 강도가 높은 운동을 하는 모양이었다. 치노 팬츠 역시 깔끔하게 잘 다려져 신뢰감이 드는 느낌을 주었고 버펄로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남자는 나의 곁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난 아까 그 아이의 애비 되는 사람이요”라고 남자는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아시다시피 몸이 안 좋은 아이 라오. 아내와 난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었지. 우리는 그런대로 살아갈만했다오. 아이가 없어도 그것대로 괜찮은 삶이 생각하고 우리는 우리를 서로 토닥이며 그렇게 결혼 생활을 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왔소. 하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쉬운 구석이 자리를 잡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런데 공교롭게도 13년 전에 아이가 들어선 거요. 하늘이 준 선물이라 생각했소. 아내는 정말 기뻐했다오. 물론 나 역시 눈물이 날 만큼 기뻐했지.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오. 의사들의 말로는 아이가 미숙아로 태어날 가망성이 많다고 했고 산모도 나이가 많아 출산 과정에서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오.”


남자는 손바닥으로 입 주위의 얼굴을 한번 쓱 문질렀다. 노인들 특유의 습관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남자의 말에 깊이 없는 시선으로 앞을 응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에게 아이를 포기하자고 했소. 난 아내가 없는 삶은 생각할 수가 없었소. 아내 없이 앞으로 내 남은 생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거요. 겁이 났던 거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두려움이 나를 휘어 감았소. 그만큼 아내의 존재가 나에게는 컸던 것이오. 한데 아내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소.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낳아서 기르겠다는 것이오. 엄마한테는 아이라는 건 그런 존재인가 보오. 그런 마음으로 나 역시 어머니의 몸속에서 수태하여 태어났을 테니 말이오.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아내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소. 그 아이가 설령 괴물이든 어떻든 간에 말이오. 난 그 이후로 언제나 노심초사였소. 의사들의 말로는 뇌기능이 떨어질지, 아니면 어떠한 증후군으로 태어날지 모른다고 했소. 다만 미숙아로 태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거요. 난 아내에게서 조금이나마 그 엄마라는 의미를 배웠던 거 같소. 아내는 남들에 비해 부르지 않는 배에 언제나 이야기를 해주며, 괜찮다 아가야, 넌 건강할 거야, 넌 행복할 거야, 라며 집에는 노래가 가득했소. 덕분에 나도 세상에 이런 노래도 있구나 하게 되었지.”


남자는 또 한 번 입 주위를 손으로 쓱 문질렀다. 나도 비슷하게 한 번 입 주위의 얼굴을 문질렀다.


“아이는 엄마의 정성 덕분인지 여덟 달을 채웠소. 그동안 나는 그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이 어떤지 옆에서 보게 되었던 거요. 엄마와 아이의 교감 같은 건 과학으로도 아직 규명 지어지지 않았다고 하오. 난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소. 그러면서 점점 나 역시 이 아이에 대해 애착이 갔소.”


“아이가 태어나는 날, 병원의 의사들도 초긴장 상태였소. 아이는 태어났고 아내는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죽어 버렸소. 비교적 고요하게 고통 없이 죽었소. 난 깊은 슬픔을 느꼈지만 어쨌든 이겨내고 아이를 키워야 했소.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태어났는데 아이 역시 열심히 살려고 하는 목적의식 같은 것이 보였소. 꼬물거리며 움직이는 아이의 눈빛을 보았지. 내 누이가 있는데 남편과 자식이 없어서 내 누이 역시 이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서 엄마처럼 돌보고 있소.”


남자는 구부렸던 등을 펴고서는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까.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왔소. 그 아이는 원래 당 수치가 또래의 아이들보다 높아서 그런 음식을 먹여서는 안 된다고 의사들이 말했소. 병원에서는 언제나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소. 아마도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동안 잘 참아왔다고 생각하오. 하지만 아이잖소. 으레 맛있는 걸 먹고 싶어 하고 친구를 갈구하지. 난 그동안 아이의 건강에만 신경을 썼지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에는 좀 무뎠던 듯 하오. 당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지금 병원의 응급실로 갔소. 아마도 심장에 무리가 간 듯하오. 길면 일주일 정도, 짧으면 이틀 정도 입원을 하며 치료를 받으면 괜찮을 거라고 의사가 그러더군. 아까 벤치에서 내려오는 그 아이의 눈빛을 읽었소. 집으로 가면서 당신의 이야기를 신나게 하더군.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아주 오랜만이오. 병원에서 전용 구급차를 보내왔소. 가쁜 숨을 내쉬는 아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병원에 연락을 했소. 그 아이의 고모가 같이 따라갔고 그 아이는 나에게, 당신에게 꼭 전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구급차에 올랐소. 나 역시 바로 따라가야 했지만 아이는 당신에 대한 신뢰가 대단한 듯하오. 그 아이 마음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서 이곳으로 오게 된 거요.”


이번에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남자의 눈은 조끼를 입은 바쁜 토끼의 눈처럼 충혈이 되어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기분 나쁠 만큼 맑고 화창했다. 5월은 신이 내려준 계절이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푸르기만 했다. 이 계절은 녹음이라는 단어가 어울렸고 푸른 하늘 아래 각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있었다. 각각의 삶 속에는 작은 숙녀의 삶도 있었고 은서의 삶도 있었다.


“내일은 못 올지 모르니 자신이 매일 먹이를 주는 고양이를 당신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더라오. 그러면 알 거라고. 나 역시 그 고양이를 알고 있다오. 그 고양이는 원래 주인이 있었던 듯한데 버려진 불쌍한 놈이라오. 나이도 많이 들어 버렸지. 그 녀석도 아마 나와 비슷한 몸 상태를 유지할 거요. 고양이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소. 게다가 고양이는 뒷다리 한쪽이 잘렸거든. 누구의 짓인지 모르지만 그 녀석도 아픔이 있지. 우리 집 애도 고양이의 아픔을 보듬어 주려고 했나 보오. 당신에게 고양이를 부탁한다고 하니 내 염치를 무릅쓰고 그 고양이를 부탁해 달라고 나온 거요.”


남자는 앞에 정차해 놓은 소나타에 시선을 잠시 두는 듯하더니 일어나서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도 일어나서 남자와 악수를 했다. 잡은 남자의 손바닥이 거칠거칠했다. 거친 손바닥으로 힘들지만 받아들이는 노인의 삶이 느껴졌다. 나는 알았다고 했다. 고양이는 맡겨달라고 남자에게 말했다.


“참 그런데,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따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남자는 차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가졌을 때 아이는 우리의 꿈이라고 이름은 ‘꿈’이라 하오. 우리를 꿈꾸게 하고 미래라고 말이오.”


남자는 어색하지만 만개한 주름을 보이며 미소를 만들었다. 순간 주름이 100개가 한꺼번에 얼굴에 그림을 만들었다.


꿈…….


자동차는 다시 천식환자의 기침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떠났다.


꿈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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