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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10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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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는 벤치에 힘없이 앉았다. 꿈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불려 본 적이 드물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입 밖으로 많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아픔을 가진 길고양이의 이름을 ‘꿈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른다. 작은 체구의 꿈은 더 작은 고양이 꿈이에게 앉아서 먹이를 먹여주며 ‘꿈이야, 꿈이야”라고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을 떠올리니 목이 따끔거렸다. 꿈이 역시 주인에게 버림받았기에 사람에게서 이름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세 발로, 네 발을 다 가지고 당연한 듯 활동하는 고양이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 여기 이 공원으로 사료를 주는 꿈을 만나기 위해 힘든 발걸음으로 매일 왔을 것이다. 세 발로 네 발의 인생을 살아가는 꿈이.


꿈이가 꿈이에게 먹이를 주며 마음을 전달하는 장면은 구체성이 엷어서 또렷한 상은 보이지 않았지만 꿈의 차오르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꿈은 꿈이에게 먹이를 주다가 일어나서 다가가는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나서 밝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뛰어서 달려온다.


나는 넘어진다며 천천히 오라고 말한다.


꿈은 그 작은 다리로 양팔을 벌리고 나에게 달려온다.


가까이 올수록 꿈이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 빠.


꿈은 나의 품으로 뛰어와서 파고든다.


감격스럽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따뜻하게 끓인 보리차를 그대로 마신 것 같다.


안겨있는 꿈의 뒤에는 은서가 서 있다.


은서의 손에는 꿈이 가지고 놀던 푸우 인형이 들려있다.


그리고


은서도 활짝 웃고 있다.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게 환하게 웃었다.


은서도 달려온다.


나는 소중한 그녀들을 안는다.


비현실적 이리만큼 아름다운 그녀들이다.


살면서 아름답다,라는 것이 바로 이런 장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동안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아름다움이었다.


눈물겹다.


마음이 우주의 대폭발처럼 한순간에 터지기도 하고 웜홀처럼 즉시 빠져 들기도 했다.


오만하리만치 이 순간을 과장되게 느끼고 싶다.


관념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사랑을 가슴으로 느꼈다.


꿈은 아빠를 외치며 은서의 손을 잡고 길고양이 꿈이를 보여준다.


내 의식 속에 어둠의 전후가 뒤바뀐다.


그동안 나의 몸과 의식을 짓누르는 괴로운 악취가 기억의 마른모래처럼 스르르 허물어진다.


장막처럼 나의 머리를 꽉 채운 기억의 봉인이라는 막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동안 나는 기억을 죽여버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벤치에서 눈을 떴다. 그러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게 질려있었고 바람은 하늘거리며 나뭇잎들은 바람의 움직임에 몸을 실었다. 시간은 오후가 되었지만 산책하는 이들은 꾸준히 산책을 하고 자동차는 세계를 점령하듯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니고 있었다. 건물을 쳐다보았다. 건물의 유리창으로 은서가 보였다. 정말 은서가 보였다. 은서가 창문으로 내가 앉아있는 벤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그녀다.


아침에 입고 나간 옷도 그대로이고 머리도 단발 스타일의 은서였다. 은서가 창문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들고 나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마른모래는 완연히 스르르 허물어져 빛과 어둠이 모순적으로 바뀌면서 막과 같은 구조적 뿌연 의식의 공간이 깨끗하게 보였다. 그 속에는 거짓말처럼 은서가 서있었다.


은서는 보도블록을 걸을 때 선을 밟지 않고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은서와 같이 발맞추어 보도블록의 길을 걸었다. 그럴 때면 걷는 모양은 이상해지고 뒤뚱거렸지만 은서와 손을 잡고 그렇게 걷는 것이 좋았다. 횡단보도까지 왔을 때 금을 한 번도 밟지 않으면 은서는 활짝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신장이 좋지 않아 은서는 소변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있었다. 소변의 냄새와 농도, 색을 보고도 피로감이 얼마나 쌓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내가 변기에 소변을 보고 물을 내리려면 은서가 쪼르르 달려와서 변기 속의 소변을 보고 당신, 회사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은서는 국물이 있는 음식은 잘 먹지 않았다. 쉽게 배가 부르다는 것이다. 그래도 막상 국물이 있는 음식이 앞에 있으면 잘 먹었다. 은서가 맛있게 먹고 좋아했던 음식은 대포항에서 파는 오징어순대였다. 임신한 강아지 배 모양의 뚱뚱한 오징어순대와 새우튀김이 먹고 싶다는 은서를 위해 나는 무작정 은서를 차에 싣고 속초로 향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오징어순대와 새우튀김을 10인분 정도 사들고 오면서 차 안에서 깔깔거리며 씹어 먹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은서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했다. 그녀가 슈베르트의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조금 단순했다. 슈베르트는 천재적인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150센티미터에 달하는 키와 너무 나온 배, 굉장히 큰 머리통으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에게 거절당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요. 라며 은서는 슈베르트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슈베르트는 버림받은 사랑을 사창가에서 보상받고 확인하려다가 성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그런 그가 호수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숭어’를 만들고 가극의 시초인 ‘마왕’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며 슈베르트의 음악을 은서는 좋아했다. 슈베르트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베토벤 옆에 나란히 묻히게 되어서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언젠가 그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은서가 말했다.


무엇보다 은서가 좋아하는 것은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차 안에서 시디의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는 것이다. 노래를 따라 부르다 중간쯤에서 은서는 오디오의 볼륨을 줄인다.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은서는 노래를 계속 부른다. 몇 소절을 흥얼흥얼 거리다가 볼륨을 다시 높인다. 그때 오디오에 나오는 노래 가사와 그녀 자신이 따라 불렀던 노래 가사가 맞으면 은서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특히 좋아해서 차 안에서 많이 들었던 노래가 호란의 ‘불안한 사랑’이었다.


이렇게 좋아도 될까요 왠지 난 불안해요

한 번도 이런 적 없어요 그대가 특별해요

사랑이 두렵지 않아요 곧 이별이 온다 해도

그러나 이사랑 싫어요 더 갖고 싶어요


여기까지는 볼륨을 켠 상태로 은서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볼륨을 천천히 줄인다. 은서가 죽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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