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11.
마음대로 물 흐르듯이 내 맘을 맡겨봐요
하루가 지나면 하나씩 버릴게 생기거든요
곁에 두면 생 각 하 면 사 랑 하 면 도저히 안 될 같은 사람
은서는 운전하는 나를 보면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약간은 떨린다. 고개를 돌려 은서를 보니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은서는 다시 볼륨을 높인다.
보낸다면 떠난다면 그때 더 사랑할 것 같은 사랑
불안한 사랑 그래서 이 사랑이 나는 좋아요
오디오의 노래와 은서가 부르는 가사가 맞아지면 은서는 박수를 치며 졸아했다. 은서는 좋아하며 눈물을 닦았다.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은서는 가사가 너무 슬프고 좋아서 그렇다고 했다. 이 가사의 주인공이 마치 나와 같다며 은서는 눈물을 흘렸다.
슬프거나 아파서 흘리는 눈물보다 기쁨에 흘리는 눈물은 전염성이 짙다. 기뻐서, 감동에 겨워 흐르는 눈물은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눈물짓게 만든다. 은서의 기쁜 눈물에 나도 시큰해졌다.
은서의 즐거움은 먼지처럼 작은 것이었다. 거대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고는 나는 가슴이 메였다. 그런 은서가 창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서는 한 손에 커피 잔을 들고 한 손은 배에 대고 있었다. 은서도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은서 역시 꿈의 엄마처럼 아이와 교감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불러 주었을 것이다. 아빠를 닮아야 한다든가 세상에 나오면 물론 힘이 들지만 엄마가 힘이 되어줄게, 같은 말을 하며 작게 부른 배를 문지르며 많은 교감을 했을 것이다.
짐짓 은서의 변화에 조건 없이, 순종적으로 동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서가 바라는 삶은 큰 것이 아니었다. 작은 움직임에 은서는 즐거움을 느꼈다. 속삭이면서 부드럽게 해 달라는 은서의 부탁을 무시했다. 격렬함이 부드러움을 넘어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 상대방도 좋아할 것이라며 거친 숨을 내쉬었고 몰아치는 빗속의 파도 같은 몸부림으로 은서를 대했다. 은서는 그런 나를 받아들였지만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며 부드러운 움직임을 은서는 원했다. 머리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라며 나에게 말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벤치에서 떨어진 건물 속 작은 점처럼 은서가 보였지만 나의 눈에는 또렷한 상으로 은서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제 30분 정도 지나면 은서가 건물 밖으로 나올 것이다. 나는 직장에 전화를 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동안 두려움이 깊었다. 매달 일정 금액의 정기예금이니, 청약이니 보험 등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회사에서 무서운 갑옷을 입고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어가면서 본래 나 자신을 방에 가둬버리고 숨어있던 억압적인 모습에 잠식당해 왔다. 전화기 너머 회사에서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했다. 회사에서도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달여 동안의 휴가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전화기 너머의 상사에게 아니라고 했다. 기존에 하던 일은 내일부터 노트북으로 작성해서 회사로 보내고 마무리를 짓겠노라고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근처의 애견센터로 갔다. 애견센터에 들어서니 강아지 특유의 젖비린내가 났다. 예전 같았으면 손으로 코를 막았을 법했지만 나는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뿜어내는 냄새를 온몸으로 맡았다. 살아있는 냄새였다.
강아지를 좋아하던 은서.
“고양이 사료를 좀 사러 왔습니다. 나이가 많은 고양이라 이가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한 사료였으면 좋겠습니다만. 칼슘이 부족해서 멸치를 갈아 만든 사료나 통조림 같은 것이 있을까요. 그리고 벼룩 퇴치용 고양이 샴푸와 귀이개, 귀를 청소하는 방법도 좀 알려주세요. 제가 누가 키우던 고양이를 맡게 된 경우라 서툴러서 그럽니다. 아, 물받이를 할 수 있는 그릇 같은 것도 판매를 하나요? 우유는 고양이용 우유가 있다던데, 아, 뭐라더라……. 좀 데워주면 더 괜찮은 건가요? 사료는 한 달 분량을 사고 싶은데요. 아, 네, 그렇군요. 아, 네, 네.”
양손에 꿈이의 사료를 잔뜩 사들고 애견센터를 나섰다. 그리고 오전에 갔던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일회용 면도기를 구입했다. 12개짜리 한 묶음을 구매하여 편의점을 나왔다. 나는 다시 벤치 쪽으로 가서 잠시 앉았다. 내일도 이곳에서 은서를 기다릴 것이다. 은서를 기다리며 꿈이의 밥을 챙겨줄 것이고 병원에 있는 꿈이 나을 때까지 며칠이 됐던 몇 주가 됐던 그 아이를 이 벤치에서 기다릴 것이다.
오늘은 은서가 나오면 차에 태워 대포항으로 갈 것이다. 오래 전의 언젠가처럼 대포항에서 똥똥한 오징어순대를 사들고 오면서 같이 먹을 것이다. 불안한 사랑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면서 볼륨을 높이고 부르는 가사와 시디의 노래 가사가 맞게 나오는지도 볼 것이다. 은서가 예전처럼 따라 부르지 않아도 괜찮다.
하찮지만 일상적인 부분이 은서의 마음속 가장 연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서가 건물에서 나오면 손을 잡고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고 걸으려고 할 것이다. 그전에 나는 은서를 안아줄 것이다. 그리고 대포항으로 가면서 꿈에 대해서, 꿈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이제 4시가 다가온다. 나는 일어나서 건물이 잘 보이는 쪽으로 걸어갔다. 5월의 오후는 어제와 다름없는 오후였지만 어제와 다르게 자연광이 눈부셨다. 태양빛을 이토록 오래 받아 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바람의 속삭임과 대지의 기운이 따스하다고 느껴보기도 처음이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3시 58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선은 건물의 문으로 향했다. 정각 4시에 그녀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정리를 하고 십 분이나 십오 분이 지나고 나올 것이다.라는 나의 생각을 깨고 정확하게 4시가 되고 초침이 일분을 조금 넘기는 시간에 은서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은서가 달려온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온다.
눈부신 그녀를 안아 주려고 나도 달렸다.
걸음이 가볍다.
나의 한 손에는 꿈이의 사료와 일회용 면도기가 들려있고 한 손은 은서를 안으려고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