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5.
아이는 어느 벤치 위, 나의 옆에 앉았다. 아이가 등받이에 등을 대어보니 바닥에 두 발이 닿지 않았다. 두발이 닿지 않으면 양발을 흔들흔들하게 된다. 티브이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봐도 벤치에서 두발이 땅이 닿지 않으면 흔들흔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막상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어느샌가 양발을 흔들흔들거리고 있을 줄 알았지만 아이의 다리는 인형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도 다리를 흔들었던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기억을 재생해 보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린이였을 때 살던 동네는 기억이 났지만 그 동네에서의 추억 따위는 전혀 없었다. 깜깜했다.
깜깜한 검은색은 은서와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미적으로 행복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행복한 기억이라는 것이 월급이 오르고 가전제품을 새롭게 장만하고 새 옷을 사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일반적인 행복감과는 거리가 있는 둘만의 의식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라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순간 두려워졌다. 은서의 작은 가슴을 만지면서 이렇게 그녀의 가슴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나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뻐했던 것 같지만 내 손으로 전해졌던 떨림의 기억이 없었다. 분명 나는 은서를 안아서 행복했고 품어서 기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둘만의 행복한 기억을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보았다. 옆에서 이상한 표정으로 아이가 쳐다보고 있는 것도 나는 잊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은서의 획일성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은서가 일하는 건물의 4층을 올려다보았다.
뭘 좀 먹었을까.
크랙이 지저분하게 갈라져있는 5층짜리 건물의 4층에서 은서는 일을 하고 있다. 조금은 공허해진 마음과 눈빛으로 아이들에게 수업의 내용을 가르치고 질문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받아주며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힘겨운 생각을 이겨내려고 자신을 질책하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에 은서의 얼굴에서 위기의식이라는 것을 완전히 던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편안하게 보이는 얼굴이 오히려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제 반지를 빼버리고 난 자리를 문지르며 눈물을 흘리던 은서가 일회용 면도기를 구입해 놓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어제는 많이 울었나 보다. 작은 몸에서 그렇게 많은 눈물이 흘러나온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고 안타까웠다. 면도기는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인지 물었고 은서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은서가 일회용 면도기를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 이곳에 언제까지 있을 작정이에요?” 옆에서 아이가 다리를 조금 흔들며 물었다. 나는 잠시 아이의 존재를 잊었다.
“여기서 누굴 기다리고 있거든. 저기 저 건물 보이지? 저기 4층에 아저씨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4층을 바라보면서 말이야.”
나는 오른손으로 차양 막을 만들어 눈썹 위에 갖다 대고 왼손으로 건물의 4층을 가리켰다. 아이도 눈을 찡그리며 건물의 4층을 바라보았다. 은서의 수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6시간 동안이다. 두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내가 앉아있는 형이상학적인 공원을 가로질러 갔으며 5월의 날답게 근처 유치원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서 야외 수업 비슷한 것을 했고 오래된 자동차부터 최근에 나온 차들까지 도로를 붕붕 거리며 지나갔다.
“그런데 넌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거니? 학교에 가야 할 시간 아니니? 벌써 마칠 시간인가? 초등학교 저학년은 몇 시간 안 하지? 세 시간 정도 하나?” 내가 하는 말이 아이에게 하는 질문인지 혼자 하는 말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아저씨, 하나씩 물어보세요.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라며 흥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엉터리 같은 질문에 팔짱을 끼더니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다구요”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그 모습이 마냥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꼬마만의 말투도.
“아저씨도 너에게 어느 정도 사정을 이야기했으니 너도 아저씨에게 말해주면 좋겠는데”라며 나도 아이를 따라 팔짱을 꼈다. 여자아이는 팔이 짧아서 그런지 팔짱을 꼈을 때 중국의 호떡장수 같은 우스운 모습이었다. 나는 그렇게 따라 하려고 일부러 팔짱을 우스꽝스럽게 꼈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 순간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웃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자연스럽게.
이렇게 크게 웃어 본 적이 언제였더라.
나의 웃음은 조금은 급조되거나 날조된 웃음이 많았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와닿는 웃음은 그동안 없었다는 말이다. 머리로 한참 생각해야 나오는 웃음을 짓거나 상대방에 대한 예의 갖추기 위해 미스코리아 같은 훈련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 나의 웃음은 표층적이었다. 개그 프로그램이나 티브이 속의 코미디언의 슬랩스틱으로는 웃어 본 적이 없었다. 은서와의 대화에서도 재미있다고 느꼈을 때는 한참 이것저것 생각을 한 다음에 웃음을 짓곤 했다. 어쩌면 나의 그런 태도가 은서를 서서히 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중에는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또 한 번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저씨, 저 그런데 배가 고파요. 뭘 좀 사주시겠어요? 비싼 게 아니라도 전 잘 먹어요.” 아이는 여전히 퉁명스럽다.
“타협을 하자는 거구나. 요 꼬맹이 아가씨.”
그래, 거래라는 것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앞으로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부당한 거래든, 정당한 거래든.
“아저씨가 너에게 아주 맛있는 걸 사줄 수 있는 돈은 있는데 말이야, 여기, 오늘은 이 벤치에서 벗어나기 싫으니까 근처에서 먹을 걸 사 와서 여기 앉아서 먹는 건 어때?”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여자아이는 엄지와 검지를 말아서 오케이 마크를 선보였다.
나는 여자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스타벅스에서 티라미스 조각 케이크와 녹차 시폰 케이크, 블루베리 머핀 그리고 여자아이는 고구마라테, 나는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서 들고 벤치로 왔다.
“아저씨, 이렇게 많은 걸, 우리 둘이서 다 먹을 수 있을까요?”
나는 들고 온 음식을 풀어헤치며 “걱정 마, 인간이란 보기보다 식성이 아주 좋은 동물이란다. 먹고 죽지 않는 것 빼고는 다 먹는 게 인간이야.”
여자아이는 맙소사! 하는 포즈를 취하고 고구마라테를 한 모금 빨아먹었다. 빨대를 통해서 아이의 폐가 빨아들이는 고구마라테는 쪽쪽 하며 그녀의 작은 입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갔다. 벤치의 중간에 조각 케이크와 머핀을 사이에 두고 나와 여자아이는 마주 앉아서 포장해 온 조각 케이크와 음료를 먹었다. 대량으로 제조하는 케이크라 그렇게 훌륭한 맛이 아님에도 여자아이는 마치 처음 먹어본다는 표정으로 아주 흡족한 얼굴로 맛있게 티라미스를 입에 넣었다. 어느 순간 작은 그녀의 입가에는 티라미스의 초코 가루가 간헐적으로 살포되어 있었다. 역시 아이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아이에게 티슈를 하나 건넸다.
“아저씨, 아저씨도 그럴 입장이 아니라구요”라며 아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검은색 안나수이 문형의 손거울을 꺼내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티라미스의 초코 가루는 나의 입가에도 산만하게 붙어 있었다. 정장을 입고 얼굴에 음식 가루를 묻히고 있는 모습이 의외로 어울렸다. 나는 그것을 바로 털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처럼 논다는 것이 이런 걸까.
나는 거울 속에 티라미스 초코 가루가 묻은 내 얼굴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아저씨, 빨리 드세요.” 아이의 말에도 나는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은서의 남자가 아니라 회사의 팀장, 인수합병의 귀재, 타 기업의 토마호크가 들어 있었다. 초코 가루는 그런 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얼굴이 지저분하게 변한 것이 어쩐 일인지 싫지만은 않았다.
어째서 어릴 적 기억이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