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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4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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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저씨, 아저씨는 제가 왜 아저씨 앞에서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는지 모르죠?”


아이가 약간 고개를 들고 인상을 쓰고 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니?” 나는 아이에게 조용하게 말해 보았다. 나의 말에 아이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휴우“하며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작은 꼬마 아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사뭇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그건 뭐랄까 한껏 멋을 부린 멋진 여성의 스키니 진이 걷는 도중에 엉덩이가 너무 꽉 끼어서 뒤에서 보는 사람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과 흡사했다. 진지하지만 아이의 모습은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 앞에서 웃을 수는 없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죠.”


어른스러운 말투였다. 아이가 어른스러운 말투를 한다는 것 역시 어딘가 기이한 구석이 있었다.


“어째서 기분이 안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이유가 아저씨 때문이니?” 내 말에 아이는 그렇다는 듯 눈을 한번 감고 고개를 아주 미세하게 끄덕였다.


“전 조금 있으면 가야 한다고요. 아저씨가 앉아있는 자리는 제 자리란 말이에요. 제가 매일 그 자리에서 꿈이를 만난다고요. 그런데 오늘 아저씨가 제 자리를 빼앗아서 앉아 버렸어요. 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죽 지켜봤어요. 이 자리는 많은 사람들이 앉았지만 이 시간에 이렇게 오래도록 앉아있는 사람은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뭐예요. 일도 가지 않고 한 시간이 넘게 앉아서 나뭇잎이나 찢어서 버리고 말이에요. 아저씨 때문에 꿈이를 오늘 못 만났잖아요. 꿈이는 낯선 사람이 있으면 나타나지 않아요. 먹이를 줘야 하는데…….”


아이는 매일 여기서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하지 못해서 아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꿈이라는 것이 길고양이라는 것을 알았다. 꿈이라는 고양이도 낯선 이의 출현으로 아이와 만나지 못해 잔뜩 성이 나 있을지도 몰랐다.


“아저씨 때문에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미안한데……. 어떻게 아저씨가 보상해 줄 방법이 없을까? 꿈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주면 내일 이 시간에 가져다줄게. 아주 많이”라며 나는 양손으로 큰 원을 그렸다. 아이는 변하지 않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었던 양손을 다시 내렸다. 내린 손은 부끄러워서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만 아이를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은서에게 진즉에 다가갔어야 했다. 은서에게 다가갈수록 은서와의 대화 속에 결여 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가가지 않는 것이 답은 아니지만 시간을 벌어 볼 요량이었다. 안이한 생각이었다.


애초에 평소 은서의 소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은서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었다. 나와는 반대였다. 내가 지니고 있는 적극적이고 결과가 확실해야만 마음이 움직이는 나와 그런 면모를 가득 지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에 비해서 은서는 확실히 달랐다. 정확한 양보다는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이만큼이 은서였다. 어떤 사람이 좋다, 싫다, 보다는 싫어하지는 않는 사람으로 은서는 사람을 보았다.


직유가 많았고 시처럼 말을 했다. 그만큼 많이 생각하고 작은 것에 고마워할 줄 아는 행동을 했다. 동작이 크지 않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말도 귀담아 들었다.


나는 그런 은서의 모습에 반하지 않았는가.라고 자문했다.


오래전 겨울의 어느 날 은서와 약속을 하고 곧바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일 때문에 약간 늦어져서 은서에게 조금 늦게 갈 테니 먼저 카페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은서는 알았다고 했고 나는 약속시간보다 40분을 넘겨서 약속 장소에 허겁지겁 도착했다. 그런데 은서는 카페에 들어가지 않고 코끝이 발갛게 변하여 벌벌 떨며 밖에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은서에게 왜 들어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고 은서는 무엇인가 아직 혼자서 카페에 덩그마니 앉아서 기다리는 상황이 난처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추위에 떨고 있으면 당신이 안아 주잖아요”라고 했다. 은서를 만나자마자 팔로 은서를 감아서 카페로 올라갔다. 당시에 그녀가 소녀같이 귀엽기만 했다. 여고생들은 혼자서 밥을 먹는다거나 혼자 어떤 전문점에 들어가서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다리지 못한다. 여고생들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소녀 같은 분위기가 은서에게 있어서 새로웠다.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죽 이어지지 않았다.



“꿈이는 말이에요. 이가 좋지 않아 연한 고양이 사료를 먹여야 해요. 통조림처럼 전문 사료가 요즘은 많아요. 우유도 아주 조금 같이 먹여야 해요. 우유는 락토프리라는 유당을 제거한 우유 여야만 해요.”


나는 아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칼슘이 부족해요. 멸치를 갈아서 만든 사료도 같이 먹여야 하구요. 꿈이가 밥을 먹을 때 습관은 밥을 먹으면서 청결을 유지해요. 그래서 옆에 물을 같이 놔줘야 자신의 발과 얼굴을 씻고 핥아가면서 밥을 먹어요. 그리고 꿈이는 귀가 짓물러서 밥을 먹고 나면 솜으로 귀를 잘 후벼 줘야 해요. 어제는 제가 방심해서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나 봐요. 발버둥을 치는 거예요. 고막이 다칠까 봐 저도 놀랐지 뭐예요. 오늘은 꿈이에게 밥을 먹이고 집으로 데려가서 벼룩 제거 샴푸로 목욕을 시켜줄 요량이었어요. 그런데 아저씨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아이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나는 지치지 않고 꿈이라는 고양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토해내는 이 아이를 팔짱을 끼고 쳐다보았다. 꼬마 아이 치고는 꽤 전달력이 강하고 경험이 풍부한 말투였다. 회사 선배들이 말하는 자신들의 아이와는 달라고 많이 달랐다.


“그런데 동물은 귀를 가급적 후벼주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던데.”


“가급적 그렇죠. 하지만 후벼줘야 하는 고양이도 존재한다구요.”


역시 지지 않겠다는 말투였다.


“우유도 마찬가지겠지?”라고 내가 말했고 아이는 빙고 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이에게 호감이 갔다. 아이 같지 않은 너무나 귀여운 아이였다.


“그렇다면 너의 화도 풀어줄 겸 아저씨가 한 달 분량의 꿈이 사료를 사주고 싶은데 괜찮을까?”라고 말했다. 꼬마 아이의 얼굴이 아주 잠시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순간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작은 아이였지만 자신의 감정 조절을 잘하는 듯했다. 감정조절을 잘하는 꼬마 아이는 나에게 무언의 합의점 같은 것이 맞아졌다는 의미를 던져주었다. 나는 팔짱을 풀고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인형 푸우를 잡고 있던 작은 손을 내주었다. 이로써 세계의 대통합이 또 하나 이루어졌다.


어디선가 이소라의 ‘트랙 8’이 흘러나왔다. 나는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가 잠시 은서를 잊어버렸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은서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은서가 일하는 건물의 4층을 쳐다보았다. 은서는 이소라의 노래를 참 좋아했다. 이소라의 그 음험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가 은서는 좋다고 했다. 공연을 할 때 이소라가 마이크를 잡는 모양새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소라는 마이크를 꽉 움켜잡지 않는다. 손가락의 중간 마디로 마이크를 아주 살며시 가볍게 쥔 느낌이었다. 그렇게 살며시 움켜잡으면 그 미세한 떨림이나 울림이 손가락으로 전해져 온다며 은서는 침대에서 나의 페니스를 그렇게 살며시 잡아 주곤 했다. 은서가 나의 페니스를 부드럽게 만져 주는 것도 좋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부드러움을 넘어서 만져주었으면 하고 종종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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