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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2

단편소설

by 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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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 잔 사들고 오는 동안 벤치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나의 시선은 발끝을 향했다. 발에 밟힌 나뭇잎을 주워 들었다. 나뭇잎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찬찬히 조금씩 갈기갈기 찢어봤다. 생각 없이 하는 반복이 질리지 않았다. 하나의 나뭇잎을 찢어서 바닥에 떨어트리는데 오 분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니, 오 분이나 걸렸다. 또 하나의 나뭇잎을 주워 든 다음 앞의 나뭇잎보다 더 잘게, 더 천천히 시간을 들어 갈기갈기 찢었다.


또 하나, 또 하나.


거북이의 걸음처럼 느리게 시간을 죽여가며 나뭇잎을 찢어 봐도 그 자리에는 새로운 나뭇잎이 다시 떨어져 바닥을 메꿨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짓밟힌 기저귀 모양을 한 구름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것 같은데도 기저귀 모양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똥 모양이 되고 어느 순간 저만큼이나 가버렸다. 시간이 흐른다는 증거다.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란 후퇴성이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점점. 점점.


나는 눈을 감았다.


은서는 어젯밤에 결혼반지를 빼버렸다. 반지를 빼버린 자리에는 그동안 쌓여있는 눈이 깊게 짓눌린 자국처럼 결혼의 자욱이 허옇게 색을 만들고 있었다. 은서는 오른손으로 띠 모양의 허연 부분을 마구 문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에게 채찍질이라도 하듯 격렬하게 왼손가락의 그 관념의 무채색 자국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문득 앞을 보니 어느새 왔는지 일곱 살 정도의 꼬마숙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아이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나는 순간 대처 능력이 떨어졌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성인들을 상대로, 성인들만의 공간 속에서 성인들만의 시선을 받으며 생활을 하다 보니 아이들이라고 하는 꽤 큰 공백의 메타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안녕”라고 손을 들어서 어설프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에도 아이는 햇빛이 눈부신지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간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머리는 양 갈래로 묶었으며 그 모양은 요즘 잘 볼 수 없는 머리 모양이었다. 녹색과 카키색의 중간쯤의 티셔츠에 물 빠진 진을 입고 어린이용 스니커즈를 신었다. 한 손에는 푸우 인형을 들고 있었다. 나는 빤히 쳐다보는 여자아이 앞에서 마치 발가벗겨진 인형처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대꾸도 않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나는 아이에게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저씬 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여기 오래도록 앉아 있는 거죠?”라고 아이가 나를 향해 최초의 말을 했다. 또박또박 내뱉는 말투 속에는 힐난조가 가득했다.


“그게 말이지 말로 하자면 좀 길어지는 이야긴데, 아저씨가 하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오늘이 쉬는 날이라서…….”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벤치의 등받이에서 등을 떼서 풀어헤쳐진 자세를 조금 올곧게 만들었다.


“아저씨, 그리고 밑을 좀 보세요. 아저씨가 나뭇잎을 얼마나 흩뜨려놨는지 아세요? 이제 좀 있음 여기 청소하시는 할아버지가 오시는데 아저씨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겠어요.”


아이는 나의 행동이 정말 못마땅한지 미간을 잔뜩 좁히고 앙칼지게 말했다. 나는 아이 쪽으로 상체를 살며시 굽히며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만의 맑은 눈동자.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으면 내 모습도 그대로 맑음 속으로 투영되어 없어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눈은 생각보다 맑아서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은 지저분하고 더러운 몹쓸 것에 찌들어 있는 모습일 것이다. 어딘가 오목렌즈에 비친 얼굴처럼 일그러지고 인간의 얼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이의 얼굴을 조금 더 깊게 바라보았다. 아직 덜 빚어졌지만 곧 오뚝해질 콧대며, 덜 자란 눈썹이며, 심술이 가득한 볼, 조금 벌어진 토끼이빨의 모습과 들고 있는 인형 푸우의 손보다 조금 더 크지만 작은 손.


음악을 듣고 있었는지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7살짜리 아이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다는 것이 새삼 기이하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터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내 경우에 7살은 아니었다. 나와 은서의 아이가 제대로 태어났다면 지금 앞에 있는 이 아이처럼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파고들었다.


“무슨 음악 듣고 있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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