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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머무는 곳에 1

단편소설

by 교관

소설 속 문장: 유산이 된 것은 은서의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은서는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획일성 때문에 아기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 획일성은 무서운 것이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이 그 침대에 맞지 않으면 잘라 내거나 늘려서 처참히 죽여 버려야 했던 삶을 살아온 자신과 나를 원망했다. 아기가 유산되고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금씩 보이지 않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생활은 서로의 잘못이 보이는데도 아무런 말을 서로에게 해주지 않았다. 무관심이라는 세계 속에 우리는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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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서가 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은서에게 기다리겠다고 했다. 은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거니 피식 웃고는 4층에 자리 잡은 단과학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은서는 내가 여섯 시간이나 걸리는 시간 동안 기다린다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서가 건물로 쏙 들어가는 모습을 본 다음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자 이제 다음은,라고 생각했지만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사를 하고 난 다음 텅 빈 집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다음이라는 것이 없었다. 정확히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몸이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무엇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서가 일하는 일터의 주위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소박하고 조용한 작은 공원이 있었고 공원 안에는 벤치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어린이들로 하여금 모여 놀만한 거리를 제공하는 공원은 아니었다. 공원은 마치 형이상학적인 공원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공간이 있는 김에 거기에 공원의 모습을 한 무엇인가를 넣어보자,라고 해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정리가 전혀 되지 않은 잔디가 보였고 나무가 어울리지 않게 땅을 뚫고 올라와 있었고 작고 적은 돌이 깔린 길이 보였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은서가 일하는 곳에 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작아 보이는 공원으로 갔다. 거기서 여러 개의 벤치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벤치에 앉아서 보니 은서가 일하는 건물의 4층이 눈에 들어왔다. 막상 앉으니 엉켜있는 생각들이 엉덩이와 함께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벤치……. 벤치에 그런 기이한 기운이 숨어있었나.


그동안 은서의 일터에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처럼 나는 공원 벤치 같은 곳에 앉아 본 기억도 없었다. 벤치는 딱딱한 나무로 보이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의자였지만 의외로 앉아 있으니 편안했다. 집안에 있는 소파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편안함이었다. 일종의 잘 다듬어진 공공성일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려 옆의 벤치를 보았다. 옆의 벤치도 내가 앉은 벤치와 같은 모양이었지만 그 벤치를 감도는 시간성이 또 다른 느낌인 것 같아서 일어나서 옆의 벤치에 앉았다. 하지만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이상하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이 벤치는 나를 밀어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이 벤치에서는 은서가 있는 건물의 4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가로지르는 도로의 자동차들만 많이 보였다.


어색했다.


어색한 건 딱 질색이다. 보통 어색한 인간들과 많이 만나야 하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어색함을 많이 느꼈고 늘 그런 사람들과 대면할 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색한 사람 앞에서 어색한 티를 내서는 안 된다. 그 점 덕분에 회사에서 나는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처음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 무엇인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표현할 수 없는 안온 감이 들었다. 평일이지만 휴무를 냈다. 회사에서는 끝 낼 일이 코앞이라 당연히 안 된다고 했다. 나는 회사에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회사를 위해 조퇴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맡은 임무는 철저하게 해냈다. 그 점은 회사에서 더 잘 알지 않느냐. 조직은 개인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조직을 위해 몸을 바쳤다고 생각한다. 역시 회사에서 잘 알 거라고 본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은 출근하지 않겠다.


내가 빠지면 프로젝트가 진행이 어렵다고 회사에서는 강압적으로 나왔지만 나는 더욱 노골적인 얼굴을 하고 고집을 부려 회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고 나는 나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합리화 덕분에 회사에서도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빌미가 되었다.


오늘은 은서가 일하는 동안 회사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출근할 때 입는 정장을 그대로 입고 벤치에 앉았다. 벤치에 멍하게 앉아 있으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아마도 자를 실업자 같은 사람으로 보았지 싶다. 나에게 보내는 눈길을 감지했지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은 그렇게 남의 일에 신경을 써가며 사사건건 참견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것을.


평일의 오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위해 도보를 하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며, 주차 딱지를 떼고 욕을 하며 조깅을 하며 음악을 듣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한참 앉아 있다가 커피를 투고하기 위해 일어났다. 커피를 가지고 올 때까지 이 벤치에 아무도 앉아있지 말았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데 누군가 내가 떠난 자리에 와서 앉을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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