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대학교 일 학년 시절에 소설을 쓰는 스터디 모임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다. 하루는 모임의 주최자였던 B가 한 가지 미션을 내렸는데, 소설 속, 혹은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 하나를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집에 있던 고전들을 뒤져가며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을 찾기 위해 애썼다. 뭔가 첫 모임에서, 첫 과제였기에 특별해 보이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그 시절 내가 생각하기에 "있어 보이는 문장"을 메모한 채로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내 생각보다는 미적지근한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잖아?라는 생각에 만족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과제를 내준 B의 차례가 다가왔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나는 이 문장을 듣고 적잖게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토록 짧은 문장에 정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 작가님은 저런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면 저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모임이 끝나고 나는 B에게 이 소설의 제목을 물었고, 그녀는 박민규 작가님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고 말해주었다. 곧바로 책을 구매해서 이틀 남짓 동안 다 읽어버렸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꼭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꼭 이런 작가가 돼 보이겠다고.
그 후로부터 나는 박민규 작가님의 문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모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느낌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문장의 형태부터, 대화체지만 ""을 쓰지 않는 것. 뭔가를 강조하기 위한 혹은 내가 알 수 없는 작가님만의 포인트를 주기 위해서 문단을 나누는 것. 모임 때마다 나는 그를 따라 하기 위해서 내 나름대로 문단을 나누고 문장을 써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박민규를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문단을 나눈 이유는 있는지, 왜 이런 표현을 썼는지에 관한 이유를 물어보기도 했고, 이유가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는 말도 듣게 된다. (이 말들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쯤 지나자 더 이상 이런 말들은 듣지 않았다. 그 대신 박민규 풍이 느껴진다는 말부터, 그 사람의 느낌이 나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다른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결국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박민규'였을까. '소설가 맹남욱'이었을까. 내가 쓰고 있는 소설에는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박민규 작가님을 모방하고 흉내를 내면서 정작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망각하며 글을 썼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부터 나는 소설을 쓰면서 박민규에 가려진 혹은 내 삶 속에 가려진 '나'를 찾기 위해 애써왔다. 감정 속에 가려진 나. 사회 속에 가려진 나. 사람들 속에 가려진 나. 그리고 그 모습의 파편들을 조금씩 찾아낼 때마다 나는 소설을 썼다. 그리고 그 속에 '나'라는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두고 나왔다. 일 년에 한 편씩 완성했던 소설들의 주인공은 모두 나를 닮아 있다.
내가 그 시절에 했던 고민들, 환경, 관계, 사랑, 아주 기다란 일기를 썼던 것도 같고, 아주 짧은 산문을 썼던 것 같기도 했다. 가끔씩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썼던 소설들을 꺼내서 읽어보기도 한다. 친구 때문에, 사랑 때문에, 환경 때문에, 직장 때문에 커다란 감정의 태풍에 갇혀 있던 나를 보며 마음 한편에 작은 위로를 담아 보내보기도 한다. 언젠가 그 커다란 태풍이 모두 사라지고, 화창한 하늘을 마주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그리고 만약 또다시 태풍이 오게 되더라도, 너의 손을 기꺼이 잡아줄 사람들은 언제든지 있을 거라고. 너는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거라고… 저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