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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리 Dec 11. 2024

너의 속사정

썩은 물     


물이 썩으면 먹을 수 없다. 인간은 썩은 물, 오염된 물을 여전히 배출하고, 오염물을 배출하는 동물 또한 지속적으로 사육하고 죽이고 먹는다. 악순환의 고리는 지금도 이어진다. 물은 재생 능력과 직관, 신비주의, 강박관념, 그리고 약간의 편집증과 연관된다고 주디스 베넷이 말했던가. 너는 유난히 깔끔 떨었다. 유기농, 친환경 먹거리를 공급하는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으로 아이를 키우고, 3살까지 모유를 먹였다. 모유를 먹여야 면역력이 높고 자녀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네가 똑 부러지게 갈아 넣은 육아를 했어도 시가에서 고생한다는 말, 도와주겠다는 말 한번 들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 집에 있는 네가 등골 빼먹는다는 소리나 들었다. 그렇게 아들, 아들 하는 시가인데, 너는 연이어 네 딸을 낳고 한 아이를 유산했다. 그 아이가 아들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시대에 누가 애를 그렇게 낳느냐고, 너 같이 똑똑한 애가 집에만 있으면 그 자체가 사회적 손실이라는 여러 번의 지인 충고도 귓등으로 흘렸다. 어떤 강렬한 신념이 널 그렇게 붙들었는지, 피임의 실패인지, 정력을 핑계로 정관수술을 안 받은 그놈 탓인지 몰라도 너는 네 명의 딸을 낳고도 부지중에 유산한 아이가 가엽다고 목놓아 울어댔다.      


흑미     


언제부터 검은 게 각광받았을까. 어떤 이유로 검은색이 우리 몸에 좋다고 알려진 걸까. 원래 쌀은 흰색이 아니라 갈색이라고 현미식을 권고한 문구를 읽은 적도 있고, 흑미가 왕이 먹었던 쌀이라는 글도 봤다. 어쨌든 식품에서 백색은 죽음을 부르는 색으로 알려졌다. ‘독이 되는 화이트 푸드’ 5인방에 이름을 올린 식품은 밀가루, 설탕, 소금, 화학조미료(MSG)에 백미가 포함되었다. 너는 유독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쌀밥을 좋아했다. 건강을 이유로 잡곡 열 종류 이상을 넣어 늘 붉은 밥을 먹어야 했던 넌 네 엄마를 원망했다. 다른 집에는 다 흰쌀밥인데, 왜 우리 집만 이런 밥이냐고, 도시락 꺼낼 때마다 창피하다고 투정을 부렸다. 잡곡밥이 그래 보여도 몸에는 정말 좋다며 네 엄마는 널 다독였다.          

  

까마귀


눈이 가려지면 사물을 왜곡한다는 말이 있다. 언제부터 까마귀가 흉조가 되었을까. 서양과 일본에서 까마귀는 길조라고 말했다. 너는 까마귀 오(烏)와 나쁠 오(惡), 더러울 오(汚)의 발음이 서로 비슷한데다 한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동아시아 대륙에 중국 문화권을 전파하면서 붉은색을 중시했는데, 거기에 상극이 되는 검은색을 금기시킨 데서 까마귀가 흉조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어쨌든 넌 우리나라에서 길조로 불리는 까치보다 까마귀를 사랑했다. 까악 까악 우는 소리가 성가시기보다 즐거운 노랫소리 같다고 말이다. 넌 그렇게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가까이했다.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것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의견, 다른 관점에 심취했다. ‘왜’라는 말을 좋아했고, 단어 곱씹기를 즐겼다.    

       

까맣게 지새다     


딸아이들이 쏟아낸 빨랫감을 세탁기에 털어 넣고 멍하니 베란다에 서 있던 너는 자신을 위해 지새본 날이 언제였나를 떠올렸다. 대학에서 학점 관리할 때도 생각나고, 그놈과 미친 듯이 싸운 날도 그랬고, 신림동 원룸에서 고시 공부할 때도 기억났다. 치열하게 공부했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게 마음잡고 하던 고시 공부를 그만두고 넌 결혼을 선택했다. 1차에 아깝게 떨어지기를 몇 번한 후에 정말 쉬고 싶었던 거니? 모의 점수가 너보다 못 하던 녀석들이 척척 1차에 붙고 으스대는 꼴에 자존심 상했니? 부모님께 약속한 1차 3년 기한이 틀어져 포기한 거니? 그때 고시 공부 아니면 결혼이란 두 가지 선택지 외에 네가 다른 선택지에도 눈을 돌렸다면 어땠을까. 그놈과 헤어지는 마당에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린 네 엄마를 원망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겠지.     

     

흑지     


흑심은 봤어도 흑지는 잘 보지 못했다. 우연히 『오늘의 SF #1』에서 흑지에 쓰인 흰 글씨를 본 너는 신기해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사물의 기본이 흰 것이 아닌가. 네가 지금 쓰는 노트북도 흰색이고, 한글 워드 바탕도 흰색이다. 심리학자들도 인간이 흰 바탕에 태어났다고 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눴다. 흰 바탕에서 태어났다고 본 심리학자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도화지 상태에서 인간이 태어났다고 보기에 양육자와 주변 환경, 교육과 사회 등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그를 다르게 채색할 수 있다고 봤다. 반대 입장에 선 학자들은 이미 채색이 되어 태어났다고 봤다. 그가 선택하지 않은 양육자와 태어난 나라, 양육자의 계층과 언어, 환경 등의 요인은 색칠되어 있다는 논리다. 너는 학자들의 양분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흰 도화지 상태에서 태어나지도, 이미 채색되어 바꿀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주장에도 결을 달리했다. 아마 중간쯤의 입장이었지 싶다.         

  

검은 개      


너의 집은 진돗개 두 마리를 밖에서 키웠다. 지금은 반려견, 반려묘가 보편화됐지만, 아무리 아끼는 존재라도 집 안에서 키우는 상상을 못 한 시절이 있었다. 네 아버지가 튼튼하게 개집을 지어주고 살뜰히 돌보며 키웠다. 이름이 손오공과 저팔계였는데, 네가 지었다. 네 언니들이 개한테 무슨 손오공과 저팔계니 하며 손사래를 쳤지만, 넌 아랑곳하지 않았다. 쟤들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날면 어때서라며 반격했다. 웬일인지 네 아버지도 이러니 저러니 토 달지 않고 네가 지은 이름을 받아들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땅에 사는 게 영 못마땅한 네 마음을 진돗개 이름에다 소복이 담은 거였니?         

       

흑발     


‘흑발을 날리며’라는 영화는 없었지. ‘태극기 휘날리며’ 란 영화는 있었고. 너는 불현듯 이쑤시개를 꼬나물고 트렌치코트 깃을 휘날리는 주윤발이 생각나지 하며 갸웃거렸다. 당시 주윤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너는 엄청나게 긴 머리카락을 사다리 삼아 갇혀있던 탑을 오가던 라푼젤도 떠올렸다. 라푼젤은 아마 금발이었지. 넌 오래도록 긴 머리 흑발을 좋아했다. 언제부터 너는 네 엄마에게 반항한다며 몇 년간 기르던 그 아름다운 흑발을 단발로 싹둑 자르고는 더 이상 기르지 않았다.        

        

상복     


순수혈통의 백의민족임을 강조한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상복이 검은색으로 통일됐을까 궁금했다. 언젠가 네가 그랬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 의례준칙을 통해 명주나 비단이었던 수의를 상주가 입던 삼베로 바꿨고, 검은 양복은 서양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전통이 되고 여기에 완장문화가 겹쳐진 국적 불명의 형식이라고.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 탓에 거친 삼베는 부모에게 입히고, 상주는 검은 양복과 완장을 차게 됐다고. 외국영화에서 자주 접하던 검은 상복이 우리 일상이 된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서양 의례를 따른 일제의 잔재였다니 더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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