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설 <<흰>>을 오마주한 소설입니다.
차례
1장 - 너
2장 - 그녀의 뜰
3장 - 모든 검
1
너
검정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겨울에 네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재킷
비닐봉지
털
타이어
마우스/키보드
썩은 물
흑미
까마귀/흑조
까맣게 지새다
흑지
검정개
흑발
상복
연상
검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세상에 검정이 그리 많지 않은 듯 너는 순간 재킷을 떠올렸다. 그리고 비닐봉지에서 털로, 타이어로, 마우스와 키보드, 썩은 물과 흑미로 넘나들었다. 재료의 공통분모는 보이지 않고, 무의식적 연상으로 이리 저리로 날아올랐다 흑미에서 잠깐 머물렀다. 파도와 백목련을 대비할 뭔가를 찾지 못한 채 두 계단을 건너뛰었다. 까마귀와 흑조에서 까맣게 지새다가, 흑지에서 검정개로, 흑발에서 상복의 자연스러운 대비로 마무리했다.
너는 불연속적이고 모호하며 마구잡이다. 한강의 <<흰>> 소설 목차의 반대 항을 적었다기보다 네가 그리는 검은 세상을 아무렇게나 섞었다. 널 떠올리면 어둡고 칙칙하고 야비한 웃음이 떠오른다. 이리도 널 증오했나 싶지만, 그렇게 대상화되어 멀어진 건 전적으로 네 잘못이다.
넌 유난히 검정을 좋아했다. 세련미가 철철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매력을 풍기는 색상이라나. 어릴 때부터 검정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너의 엄마는 밝고 화려한 색상을 좋아했으니까. 언제부터 너는 검정에 유혹됐을까. 알 것 같으면서도 너에 관해 모르는 게 많다. 짙은 브라운을 좋아하는 줄은 알았다. 이유는 몰랐지만. 네게 썩 어울리는 색이라 그랬을까. 어느새 검정으로 갈아탄 너를 봤어. 마치 흑설 공주 같았지.
재킷
너에게 재킷은 갑옷이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무기 같은. 넌 언제나 화가 나 있었어. 친근히 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은 얼굴, 만만히 봤다간 가만있지 않겠다는 전투적인 눈과 앙다문 입이 말하고 있었다. 네가 언제부터 세상과 사람을 향한 적의를 품고 살았을까 종종 궁금했어.
너의 대학시절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참 이상하다고, 이해가 안 됐어. 남자들로 가득한 법학과에서 몇 안 되는 여자인 네가 과대표를 했대. 그럴 만했지. 워낙 똑똑하고 강단이 있으니까. 네가 자원했는지, 누군가의 추천인지, 아니면 추천된 몇을 투표해서 과대가 됐는지 몰라도 수긍했어. 넌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와 말발을 갖췄다.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네가 한동안 대순진리회에 빠져 네 아버지가 준 입학 축하금을 탕진했다는 말이었어. 논리와 설득력으로 무장했을 법학도가 대순진리회에 미혹되어 돈을 갖다 바쳤다는 게 좀 이상하더라고.
법학과 과대 1학년과 대순진리회에 빠진 법학과 신입생의 조합이 잘 연결이 안 돼.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닌데 말이야.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생이 느낀 정체성 혼란이랄까. 갑자기 부여된 대학생의 자유와 오백만 원이라는 큰돈, 게다가 종교. 자신이 누군지 알아볼 탐색의 시간을 전혀 가져본 적 없는 인간에게 찾아온 ‘도를 아십니까?’의 종교. 제사를 지내야 가정이 편안해진다, 조상에게 잘 보여야 앞길이 편다는 메시지들. 한복을 입고 제사상에 절했을 널 떠올리는 게 이상한데, 또 어울렸을 것 같아. 넌 어깨가 좁아 한복이 잘 어울렸거든.
비닐봉지
넌 비닐봉지를 많이 썼다. 뭔가를 담을 때도 그랬지만, 가방에 검정 비닐봉지 몇 개를 넣고 다녔어. 술 취한 뒤의 구토용인지, 다른 용도였는지는 모르겠다. 쇼핑백도 아니고 비닐이라는 용도가 고급 진 느낌은 아니잖아. 네게 안 어울린다고 느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어. 가까운 사이라도 불편한 얘기는 삼가는 게 좋으니까.
털
넌 곧게 뻗은 직모에 머리숱이 참 많았다. 탐스런 머릿결의 소유자였지. 여섯 자매 중 둘째였는데도 외동딸에게나 해준다는 디스코머리를 하고 다녔다. 외모와 성격이 닮아 편애한 네 엄마 덕을 봤지. 겨드랑이 털, 다리털도 직모로 거칠었어. 한때 제모기로 다리털을 밀다 새까맣게 올라온 털 때문에 계속 제모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걸 본 셋째가 자신의 다리도 제모기로 미는 바람에 평생 제모기 사용자가 되었다며 원망을 토로했다. 첫째와 둘째가 부러워한 셋째의 부드러운 다리털은 그렇게 제모기의 희생양이 되었다.
타이어
타이어와는 안 친했다, 한참 동안 너는. 겁이 안 많았지만, 운전을 배우지 않았다. 운전할 필요가 없었지. 남자들이 서로 태워주겠다고 줄을 섰으니까. 네가 운전을 배운 건 아이들 학원 보내고 픽업하려는 이유였다. 기동성 있는 사회인의 데뷔 이유치고는 의외였지. 너라면 한참 전에 운전을 넘어 경비행기나 패러글라이딩 자격증을 딸 법한 담력과 도전의 아이콘이었으니까. 너를 날지 못하게 한 건 너 자신일까. 굳이 날지 않아도 맞춰주는 주변 환경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너를 꼭 빼닮은 엄마의 극심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마우스/키보드
마우스와 키보드와는 꽤 친했다, 너라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었고, 내게 보여준 글은 없지만 글도 많이 썼을 거야. 사회과학 서적이나 철학책을 자주 봤고, 어떤 이야기든 똑 부러지게 답하곤 했으니까. 내가 보기에 논리가 정연하다고 할까, 지식이 많이 축적되었다고 할까. 말로는 못 당한다는 느낌.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너의 말을 듣다 보면 그럴 것 같고, 네가 말하는 책은 읽어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