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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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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리 Dec 14. 2024

그녀의 뜰1

유성이 떨어지던 밤의 그녀

히로시마의 황홀한 밤

     

그날 히로시마는 이상하게 찬란했다. 유성이 쏟아지는 걸 올려다본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삶에 찌든 마음이 와르르 녹아내리는 밤이었다. 그날이었다. 단아한 엄니와 선비 같은 아부지 셋째 딸로 그녀가 태어난 밤은. 그녀의 뜰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평온함은 오래 지속되어야 했다. 어느 봄날, 엄마 손에 이끌려 히로시마 수산 시장에 갔다. 그녀가 잠깐 한눈 판 사이, 엄마 손을 놓쳤다. 아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아렸다.

“청자야?”

“네, 아부지.”

“넌 어디서나 보이는 백자가 아니랑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청자란 말일시.”

막내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아내 손이 많이 필요한 국민학교 3학년 딸아이의 마음부터 달랬다. 한국에 돌아와 고생만 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의 장례를 치른 뒤였다.      


나무 그림자


“아부지, 난 왜 중학교 가면 안 되는디. 나도 공부하고 싶고, 학교 가고 잡은디 말이여.”

그녀는 떼쓰고 싶었다. 울며불며 중학교 안 보내주면 밥도 안 먹고 아부지 바지도 안 꼬매고 암 일도 안 할 낀 게 그리 아시소. 이러코롬 소리소리 질러서라도 동무들이 다 가는 중학교에 갔으면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못했다. 성아들 틈에 자라 눈치 9단인 그녀는 아부지가 자신을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어려운 살림에 두 성아를 시집보내고 엄니 장례까지 치른 마당이었다. 아내 없이 자랄 어린 딸을 흘깃 훔쳐보며 몰래 한숨만 내쉬는 황망하고 막막한 아부지의 심정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날 밤, 그녀는 동무들과 같이 깔깔거리며 등교하는 꿈을 꿨다.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 마, 라고 누군가 침을 뱉었다는 허수경 시인의 시구가 떠오르는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동무들의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나무 뒤에서 숨죽여 동무들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조르륵 눈물방울이 맺혔다. 


검정 고무신


동무들이 중학교 2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의 어느 날, 아내를 그리며 앓던 그녀의 아부지는 그만 사랑하는 딸 곁을 떠났다. 시리고 엄혹한 겨울이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시집간 언니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어미 없이 아버지를 건사하며 살던 그녀를 눈여겨본 서울 댁이 친척이 운영한다는 서울의 봉제공장을 소개했다.

“청자 너라면, 어디 가도 네 몫을 할 거야. 거기는 기숙사도 있으니까 먹고 자는 건 신경 안 써도 되고. 시다로 일하다 잘만 하면 반장도 할 수 있대. 내가 잘 말해놓을게.”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의 봉제공장을 검정 고무신으로 찾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길보다 더 길고 멀게만 느껴졌다.      

      

검은 가래를 뱉으며


그녀는 햇볕 한 줌 안 드는 좁은 다락방에서 하루 16시간씩 천을 자르고 미싱을 돌렸다. 옷감을 잔뜩 쌓아놓고 작업판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일했다. 실수라도 하면 재단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침 일찍 출근해 통행금지 직전인 밤 11시 30분에야 귀가했다. 밥도 못 먹고 점심시간에 일하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고, 잠 깨는 약을 수시로 먹으며 며칠씩 철야작업을 했다. 희뿌연 먼지를 많이 먹은 탓에 그녀는 자주 검은 가래를 뱉었다. 기숙사 방에 돌아오면 친구들이 깰까 봐 이불속에서 김소월의 ‘부모’를 위안 삼았다. “낙엽이 우수수 떠러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뾰족구두


월급 탄 기념으로 영화관에 간 날도 유난히 추웠다. 그녀의 친구는 모처럼 보는 영환데, 우리도 멋 부리고 영화관 앞에서 만나자 했다. 영화배우 김지미처럼 검은 뾰족 구두에 유행하던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멋을 부리며 영화관에 갔다. 공교롭게도 친구가 늦는 바람에 심한 동상에 걸렸다. 동상은 출산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양쪽 엄지발가락이 얼어버린 ‘검은 발톱의 여인’으로 살아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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