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관광 21개 장면 중 열한 번째]
1988년 4월 18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는 꽤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인원은 많지 않았다. 중국인 44명이 압록강대교를 건너 북한 여행을 떠나려 줄줄이 버스를 탑승하고 있다. 단둥중국국제여행사의 첫 번째 북한관광상품 이용객들이다.
단둥중국국제여행사는 1986년 갓 생겼지만 저력 있는 여행사였다.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중국에서 여행사란 조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중국국제여행사, 중국여행사, 중국청년여행사 3대 여행사 중심으로 운영되던 시절이다. 그러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되며 80년대 중후반 새로운 여행사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그 시작을 알린 단둥국제여행사는 오늘날 중국내 북한관광상품 취급 여행사 가운데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행일정은 단출하다. 1일 투어 상품이다. 단둥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북한 신의주를 둘러보는 일정이다. 코로나 직전까지만 해도 신의주 1일 투어 상품은 그대로 진행되었기에 1988년 처음 이뤄진 당시 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우선 출발시간은 아침 7시 40분. 꽤 빠른 시간이다. 오후에는 돌아와야 하니 부지런히 움직인다. 단둥여행사 앞에 모이면 가이드가 주의사항을 얘기한다. 관광버스에 탑승해서는 압록강철교를 건너 북한 신의주시에 들어간다. 주요 방문지로는 평안북도 혁명사적관, 영생탑, 민속공원 등이다.
점심 식사 후엔 평안북도 미술박물관에 들르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공연을 관람한 뒤 압록강공원에서 북중 접경지역의 풍광을 감상한 뒤 오후 4시 30분 출발, 5시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물론 처음 시작할 당시의 일정과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졌을 성 싶지도 않다. 하여간 이렇게 북한의 사실상의 첫 외래관광 서막은 올라갔다.
중국인의 북한 신의주관광 상품은 중국 정부가 승인하면서 시작될 수 있었다. 1987년 11월 승인된 문서에는 이전의 단둥-신의주 친선참관단을 유료관광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승인하며 1일 변경관광 시범형태의 범위, 대상, 규모 등이 적시돼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범기간인 첫 2년간에는 7차례 관광단이 조직될 수 있고 한 차수당 30명, 총 210명이 관광에 나설 수 있다고 적시했다. 1일 관광만 가능하고 참가가능대상은 한국전쟁 참전자, 퇴직간부 및 우수 노동자가 우선한다고 명기했다. 비준문서에는 이외에도 비용(자비여행), 경영(단둥중국국제여행사), 결산(변경무역회사의 수출상품으로 상환), 출입경 증명서류(양국 공안부 협의 처리)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한데 왜 중국이고 왜 변경관광이었을까. 사실 중국으로서는 처음엔 북한과의 변경관광에 부정적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의 관광정책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외래관광객 유치에 방점이 찍혀 있었고 자국민의 해외관광에 대해서는 억제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중국은 스스로 자국이 외화를 벌어야 할 나라이지 관광으로 외화를 지출하고 다닐 나라가 아니라 판단했다. 1986년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4차 회의에서 비준한 ‘중화인민공화국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 제7차 5개년 계획(1986-1990)’에는 ‘대대적인 관광업 발전, 외화수입 증가, 각국 인민과의 우호적인 왕래 촉진’이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 중국 정부가 관광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가 외화수입임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이에 중국 정부는 북한측에 중국 공민의 해외관광은 1983년 시작된 ‘홍콩 및 마카오 관광’ 뿐이라며 계속해 난색을 표했다. 실제 홍콩과 마카오 관광은 그해 11월 15일 중국 대륙 공민의 친척방문 개념으로 시작됐다.
하나 북한 요구도 계속 거부할 순 없었던 듯하다. 이에 우회 방법을 찾다 도출한 것이 변경관광 형식이었다. 즉 지방자치정부 차원의 관광 성격을 강조해 중앙 정부의 부담은 덜면서 실질적인 관광은 이뤄지게 하는 방법이다. 변경관광은 국제관광의 일종이긴 하지만 공간상으로 제약돼 있고 여행기간이 짧으며 수속이 간단하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로 인해 부담이 적고 정책적으로 통제가 가능했다. 중국이나 북한이나 받아들이기가 일반적인 관광보다 수월했을 것이다. 변경관광은 그간 존재하지 않던 개념으로 북한 변경관광이 중국의 첫 번째 변경관광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의 변경관광에 대한 입장은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적극적이었다. 1986년 관광을 책임지는 기관을 국가관광총국으로 확대개편한 뒤 총국은 외래관광객 유치의 실질적인 성공사례를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새로 만든 칼이 잘 벼리는지 확인하는 양 북한은 80년대 중반 다방면에 걸쳐 새로운 국가를 대상으로 외래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다. 일본인의 방북관광 또한 80년대 처음 시도한다.
새로 뛰어든 자본주의식 관광방식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지속성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믿을 구석은 역시 ‘혈맹국’인 중국이었다. 초기 관광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외래관광객 유치의 안정적인 기반이 필요했다. 지정학적으로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밀접한 관계인 중국은 북한이 활용할 수 있는 큰 자산이었다.
게다가 당시 중국 해외관광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 당국으로서는 해외관광을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지만 이미 홍콩 관광이 시작되고 중국인들의 경제적 여유와 해외관광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북한이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신규 조직으로 거듭난 총국으로서도 존재가치를 입증하고 든든한 채널 구축을 위해선 기존에 이미 네트워크가 확립돼 있는 중국은 가장 기대고 싶은 대상이었을 터이다. 북한은 중국과 친선참관단을 통해 매년 정기적으로 접촉하며 관광분야에서도 인적 네트워크가 폭넓게 형성돼 있었다.
이에 따라 총국은 중국에 지속적으로 중국인의 북한관광 허용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북한은 중국과 친선참관단을 통해 1986년 이 문제를 공식화하였다. 탈북자 A씨는 “변경관광에 대해 중국 정부 입장이 바뀐 것은 바로 북한에 총국이 들어서고 지속적으로 요청한 데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변경관광 성사 배경으로 무역 부문과의 연관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북중변경관광이 성사되기 이전 이미 변경무역은 적지 않은 규모로 이뤄지고 있었다. 당시 변경무역은 무역일꾼들에게 발부되었던, 일종의 관광비자 형식인 ‘도강증’만 있으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다. 이미 북중 간에는 변경관광을 위한 기반은 충실히 마련돼 있었던 셈이다.
변경관광은 변경무역과 밀접히 연관돼 있었기에 변경관광 성사는 관광분야 성장기반을 마련한다는 점과 함께 중국과의 안정적인 무역 관계를 형성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이었다. 실제로 90년대 온성지역에 거주했던 탈북자 C씨는 “관광으로 북한에 온 상당수 중국인 가운데는 무역 상인들이 많았다”고 증언한다. 중국인들의 변경관광코스에는 시장(당시에는 장마당) 방문이 필수였다. 이로 인해 “온성 장마당에 가면 낯설지 않을 정도로 중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은 다소 소극적이었고 북한은 적극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북중 변경관광은 북중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중국 정부는 단둥 등 지방정부의 지속적인 요청을 무조건 거부하는데도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단둥시 인민정부는 1985년 이미 북중변경관광 구상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앞서 단둥시와 북한 신의주시는 1984년부터 상호 친선참관단을 파견해 상대 지역에서 관광활동을 펼치기 시작했고 변경관광을 실시하기로 지방정부 차원에서 이미 의견일치를 보았다. 중국 단둥시의 이러한 활동은 중국 중앙 의견보다는 지방 성 차원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이에 1985년 구상 제기 이후 약 2년간의 설득 작업을 거쳐 1987년 11월 중국 국가여유국과 대외경제부역부는 단둥시의 북한 신의주시 1일관광을 비준하였다.
한편 변경관광은 중국정부가 건국 이래 가장 중시하는 정책 가운데 하나인 변경지역의 안정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로서도 받아들일 만 했다. 한족 외 55개 소수민족의 복잡한 민족구성을 갖고 있는 중국은 변경지역에 자리한 소수민족들의 분란은 중화인민공화국 단일성을 견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막아야 했다.
특히나 남북문제로 민감한 한반도의 안정은 개혁개방을 갓 시작한 중국으로서는 정치경제적으로 시급한 문제였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과 동북3성 지역의 요구에 대해 귀 기울였을 법했다.
이처럼 북중 변경관광은 북중 중앙정부의 입장과 북중 지방당국의 입장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도출된 합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