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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식 Oct 17. 2019

내일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30일: 루고에서 페레이라(28.66km)

2019년 6월 21일(금)

     

루고 성벽을 벗어나는 문.

이른 아침 지난 저녁의 흔적을 치우는 고마운 분들과 인사를 나누며 루고 성벽을 나왔다. 루고를 가로지르는 미뇨 강 다리 위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있었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강가를 걸었다. 이어지는 언덕길 끝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도시를 벗어난 순례길은 넓은 초지로 이어졌다.  

두 시간 정도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걸었더니 몸이 추웠다. 마침 순례길 오른쪽 50m에 바르가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앞을 보니 나와 같은 마음인 순례자들도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나이가 많은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주문을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나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두 분의 느림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아침에 마신 쓴 커피 한잔.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데 한잔이면 족하다. 

나도 그런 것에 익숙해졌는지 내부를 둘러보며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래된 잔에 나온 커피는 추운 내 몸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시원한 곳에서 마시는 아이스커피도 좋지만 쌀쌀한 날씨에 마셨던 커피의 맛은 지금도 혀끝에 아련하다.  


어제 정말 편안하게 걸었던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도 오르막 내리막이 있었지만 이미 1000m 고지를 경험했던 터라 그리 어렵지 않은 길이었다. 










파란 하늘과 적당한 구름 그리고 바람.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 않은 조화가 걷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페레이라까지의 길도 어제와 같이 평탄했다. 감사하며 걸었다. 높지 않은 언덕에서 바라보는 초지와 하늘의 모습은 언제 봐도 한복의 수채화 같았다. 왜 사람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고 병든 이들이 자연을 찾는지 새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12시를 넘어가면서 하늘은 회색빛에서 파란색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산 로마오를 지나 아름다운 숲길 끝에 알베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보였다. 역시나 점심을 먹어야 하는 때였는지 몇 번 얼굴을 보았던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와 영주 씨도 1층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다. 운동하고 나서 먹는 음식이 맛있듯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온 뒤에 먹는 음식도 맛있었다. 


7km를 걸어가니 오늘의 목적지인 페레이라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곳은 공립 알베는 없고 사립 알베뿐이었다. 해는 이미 뜨거웠고 시간도 14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보이는 알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오른쪽과 왼쪽에는 배낭이 아닌 캐리어가 가득했다. 설마~~ 하면서 직원에게 오늘 묶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예약 손님 때문에 오늘은 만실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10kg 내외의 짐을 지고 걷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가벼운 차림에 걸을 때 필요한 간식과 물만 챙겨서 걷는 이들도 있다. 프리미티보 길이 시작하는 오비에도에서부터 나는 배낭이 작다 싶은 순례자들을 보았다. 그들은 캐리어에 짐을 넣어서 다음 알베까지 보낸다. 

적어도 순례라면 자기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닐까? 편하게 걷는 것이 순례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고참 개그맨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의 짐 무겁다고 버리지 마라. 물에 빠졌을 때 그 짐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지켜준다”.  이런저런 생각이 짧은 시간에 스쳐갔다. 


다음 마을까지는 5km를 가야 했다. 뜨거운 태양의 위력을 경험했기에 난감했다. 어떻게 하나 하는 우리에게 직원은 700m 가면 다른 알베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우리는 “자기 짐은 자기가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저 서비스는 순례길에서 없어져야 해”라는 말과 “그래도 걷고 싶다는데 우리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뭔가 사연이 있겠지?”라는 말로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다. 빠른 걸음인지 700m는 금세 왔다. 

알베에 들어가니 금발의 중년 여인이 우리를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었다. 오늘 묶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침대가 두 개 남았고 당신들이 행운의 주인공이라고 한다. 그 말이 끝나자 옆에 있던 순례자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우리 둘은 환한 미소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박수받을 만큼의 일인가?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순례길에서는 이런 작은 것에도 박수를 치고 좋아할 일이다. 사소함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면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때 감사하는 것도 잊어버린다. 

숙박비와 저녁식사 아침식사비용까지 26유로였다. 시설은 좋았다. 길을 걸으면서 마주쳤던 순례자들이 반갑다며 인사를 해주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5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알베 뒤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선 베드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나는 오늘까지 30일 딱 한 달을 걸었다.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72km. 바욘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거리가 778km였다. 하루 평균 26km를 걸었다. 지나가는 구름처럼 때로는 빨리 때로는 느리게 걸은 발자국들이 모아진 결과에 나는 놀랬다. 

오후의 여유로움은 저녁에 빨래가 말랐는가로 알 수 있다. 이날은 정말 여유로웠다. 

 느리게 걷는 옆으로는 도로를 따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들이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두 번 그 차량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느림의 속도와 빠름의 속도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고 빠름은 언제나 그랬듯이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느림이 보여주고 알려주는 그 무언가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루는 쉬셨다. 사람에게 휴식이 왜 필요한지를 하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그 휴식을 사치라고 말하며 일에 매진하게 했다. 돌아온 것은 피폐해진 몸과 마음이었다. 일과 직장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들은 그제야 휴식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휴식이란 게 무엇인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빠름의 옆에서 느리게 걸어보니 새삼 느리게 걷는 것이 왜 사람에게 이로운지 알 것 같다. 사람은 결코 기계의 도움 없이는 빠르게 갈 수 없다. 기계는 완벽을 추구해도 고장이 난다. 그때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느림의 속도로 돌아가야 한다. 

느리게 가는 것이 게으름의 상징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 걷는 느림은 칭찬받아야 한다. 아무리 빨리 가도 인생의 종착점은 느리게 가는 이의 그것과 같다. 그러니 자신보다 느리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최선을 다한 오늘은 내일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바욘부터 페레이라까지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걸었다. 4일 동안 비를 맞고도 걸어봤다. 뜨거운 태양과 

도로의 열기가 합작한 도가니 같은 길도 걸어봤다. 차가운 바람에 몸이 흔들리는 길도 걸어봤다. 걸어야만 했고 그 걸음이 모아진 결과는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니 지금껏 최선을 다해 걸은 나에 대해서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좋은 길. 비아누 비아누~~~

빨리 가는 것. 걸어보니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혼자 빨리 가면 좋은가? 잠시는 좋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빠름은 외로울 뿐이다. 그것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걸어보니 그런 리더는 진정한 리더가 아닌 것 같다. 

진정한 리더는 함께 하는 사람이다. 함께 한다는 것은 주위를 돌아볼 줄 알고 그들과 삶을 나누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좋은 예이다. 생각해보라. 창조주가 피조물의 뱃속에서 10개월을 있는 것이 얼마나 갑갑한 일인가? 창조주가 가장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갑갑한 일인가? 피조물의 손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고 살 수 있는 아기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답답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통과하셨다. 창조주이셨지만 가장 사람다운 삶을 사셨던 분이 예수님이셨다. 

가난이 무엇인지 아셨다. 배고픔이 무엇인지 아셨다. 그러기에 당신의 말씀을 듣던 이들의 배고픔을 모른 척하지 않으셨다. 고통이 무엇인지 아셨다. 죽음이 왜 사람에게 두려움이며 슬픔의 단어인지를 아셨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시고 창조주이셨지만 죽음의 잔 만큼은 비껴가기를 기도하셨던 사람이셨다. 당신과 3년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무지함과 배신을 창조주의 입장에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봐주셨기에 제자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지 않았을까?


내일이면 프랑스길과 만난다. 많은 사람들 속에 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답답함이 밀려온다. 하지만 여태 사람 구경하지 못했으니 이제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다양한 루트가 있다. 

알베에 걸려 있는 순례길을 보면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룬에서 헤맨 그 길도 순례길의 일부였다. 그 길을 따라 남서쪽으로 가면 프랑스 길과 만나게 되어 있었다. 한때나마 길을 안내해준 할아버지께 원망했던 마음이 감사로 바뀌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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