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살 이야기 4 Korea, Jeonju
또 신중해지려다 놓칠지도 몰라요
지금 하는 고민 말이에요
- 안상현의 '달의 위로' 중에서
떠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떠나겠다고 항상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단지 불분명한 두려움에 결단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두려움을 허물고 용기를 낸 날이다. 그런데 하필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날짜가 학교가 개강하기까지 10일정도 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다. 물론 가까운 나라에 일주일 정도 다녀오는 것도 좋겠지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학생 때의 여행을 일주일 정도로 짧게 끝내기는 싫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몇 주간 수업을 재끼기로(?) 결심했다.
아직 마지막 한 한기가 남은 만큼 들어야 하는 수업도 남아있었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근거없는 무모함은 모든 두려움을 집어 삼킬 만큼 실로 컸다.
며칠 뒤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당당히 나의 용기를 선포했다.
-"나 한 달 동안 여행 좀 가려구"
그러나 나의 당당함에 당황한 친구들은 순간 이맛살에 주름이 지도록 동공을 확장시키며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어냈다. 그러더니 이내 걱정이 어려있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굳이 학교까지 빠지면서 여행을 가야겠어? 취직하고 가면 되지 않아?”
“상반기 공채에서 많이 뽑을 거라는데 원서 안 넣으려고?”
"성적은 어떻게 하게, 괜찮겠어..?"
괜찮을지는 어떻게 알겠는가, 그때 가봐야 알겠지. 그리고 개강을 맞이하기 전, 평소 친하게 지내는 형과도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학교 앞 닭갈비 집에 앉아 술을 한잔 곁들이면 취업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하던 중 형에게도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 나 졸업하기 전에 여행 한번 떠날려고."
-"언제 가려고 하는데?"
-"곧 떠나려고"
-"갑자기? 너 지금 4학년 아니야?"
-"응 맞아."
-"남들 다 취업 준비로 바쁜데 갑자기 웬 여행을 떠나겠다고 그래, 뭔 일 있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졸업하기 전에 여행이 하고 싶어서."
-"지금 뭐 준비해놓은 것을 있고?"
-"그냥 저번에 토익 점수 하나 받은 거 있어."
-"야 그럼 지금 서류합격 커트라인 맞춰 놓을려고 뭐라도 따야 하는 거 아냐? 뭐 얼마나 다녀오게"
-"한 달 정도 다녀오고 싶어."
-"야 힘들면 그냥 어디 근처 바다가서 그냥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라, 지금은 그렇게 여행할 때 아니야."
-"모르겠다. 그냥 뭔가 그냥 답답해."
-"그러니까 어디 근처 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니까, 무슨 한 달씩이나 여행이야. 너 언제쯤 철들래"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언제쯤 철들까.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을 해도 철 없다는 소리 들으니까 뭔가 마음이 허전하다. 왜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고 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철이 없는 행동인걸까. 사실 주변 사람들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과 같이 취업도 어려운 시기에 고작 며칠 간의 즐거움을 위해 돈과 시간적인 리스크를 감수하고 떠나는 것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것이다. 거기다 개강을 앞둔 시점에서 덜컥 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나를 정상으로 쳐다볼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나는 항상 하고 싶은 일을 버려두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하에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아직 내가 사리 분별에 어두운 탓에 어쭙잖은 것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그리고 처음에 당차게 선포했던 것이 주변의 걱정으로 인해 걱정되기 시작하고, 주변 사람들의 충고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무언가 세상을 거꾸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미 떠나겠다고 부푼 풍선처럼 들떴던 마음은 조금씩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겨울내 잘 견뎌주었던 얄따란 옷을 가슴께로 여미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느지막한 저녁, 가로수가 늘어선 길은 고요하다기 보다 쓸쓸했다. 그리고 그길을 걸으며 모서리가 밋밋해진 여행에 대한 다짐을 또 한번 떠올렸다.
'그냥 떠나지 말아야 할까. 평소처럼 열심히 공부를 할까. 남들이 다 하지 말라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이미 바림이 한번 휘젓고 간 나의 다짐은 쉽사리 잠잠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항상 선택에 기로에 서있을 때 누군가 나를 향한 조언들이 결정적인 귀띔이 되어 내 선택을 좌우했다. 그 경험들이 한 두번씩 쌓이고 쌓이며 나의 주관은 점점 옅어졌고, 그러면서 내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남의 조언과 충고대로 삶을 살다 보니 어쩌면 지금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니까 말이다.
평소라면 이번에도 ‘맞아, 지금 내 주제에 무슨 여행이야. 취업이나 먼저 하고 떠나자.’하며 쉽게 포기했을 텐데 이번에는 패기인지 객기인지, 한 번쯤은 사람들이 건네는 조언과 충고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고작 한 달 떠나는 여행으로 굶고 살지도 않을 것이고, 또 지금 공부를 한다고 해서 성공한 부자로 살 것도 아닐테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미루면 다음이라는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일로 미룬 일을 내일도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고로 사람의 마음이란 약풍에도 휘청휘청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이라 지금 이렇게 확신이 있지만 언제 또다시 사람들의 충고에 마음이 흔들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선택을 되돌릴 수 없도록 만들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곧바로 비행기 티켓을 질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적지 않은 항공권 값에 마우스를 잡은 오른 손은 클릭 한번에도 바들바들 떨렸지만 어쨌거나 진짜로 예매를 했다. 바로 <환불 불가>.
환불 불가라는 규정은 다른 항공권에 비해 저렴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한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 문제와도 같았다. 그렇게 어찌됐든 이제 떠나겠다는 마음을 이제 더이상 환불할 수 없으니 아무리 흔들려도 꼼짝없이 여행을 떠나게 됐다.
혹시라도 한 달간 여행 뒤에 차라리 공부나 할 것을 괜히 떠났네라며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인생에 있어서 후회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이번에는 미쳤다는 소리 듣고 후회해보련다.
그리고 손에 쥔 것 없고 잃을 것도 별로 없을 때 무모해져보련다.
가즈아ㅏ!ㅏ!ㅏ!
매번 아름답게 돌아오는 벚꽃나무가 되고 싶다.
아니면 언제나 아름다운 사철나무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한 번, 젊음은 순간
바라기는 젊음의 아름다움이
벚꽃처럼 한순간에 왔다 가지 않기를.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