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가 갑자기 의사인 나 앞에서 철퍼덕 쓰러졌다. 이런 일이 흔하진 않지만 1년에 5번 정도 경험한다. 대개는 주사를 맞자마자 긴장해서 나타나는 vasovagal syncope (미주신경성 실신)이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그 때 에어컨도 켜지지 않는 공장에서 자기 몸을 보호해 줄 수 없는 나시와 반바지를 입은 채 몸의 절반은 무엇인지도 모를 페인트에 젖어서 내게로 오는 공장 근로자들을 보았다. 누가 봐도 유해할 것 같은 물질들을 몸에 뒤집어쓰고 오는 공장 사람들이었다.
흰색, 빨간색 페인트 자국이 묻어 정작 본인의 피부색이 무엇인지 알기도 어려웠다. 그런 그들이 유해증기가 가득한 공장에서 필터 달린 방독 마스크를 쓸 리 만무했다.
누워서 쉬던 근로자가 좀처럼 어지럼증에 일어나지 못했다. 뇌로의 혈류가 회복되었을 텐데도 회복되지 않는 건 증기 유입으로 인한 신경학적 증상으로 의심되었다.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공장 검진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고 싶었다. 빨리 그 사람의 피검사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매일 그 사람의 피검사 결과가 업데이트되었나 마우스 클릭을 했고 2주쯤 지났을 때 빨갛게 뜬 그 사람의 피검사 결과를 볼 수 있었다.
O-CRESOL (O-크레졸) : 4.2mg/g
AST : 88U/L
ALT : 100U/L
GGT : 78U/L
역시나였다. 공장에서 사용하는 물질 중 하나인 톨루엔에 사람이 노출되면 우리 몸에서 대사 후 O-CRESOL (O-크레졸)이라는 물질로 전환되어 소변을 통해 배출된다. 만약, 고농도의 톨루엔 증기를 흡입하였다면 배출되는 소변 속 O-CRESOL (O-크레졸)농도가 올라갈 수 있고, 수시간 내에도 어지럼증 등의 신경계 증상이 나타 날 수 있다. 간수치까지 올라간 이 근로자를 나는 직업성 질병(D1)으로 판정하였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는 다양한 산업현장이 있고 많은 유해인자들이 있다. 비슷한 업종인 회사끼리도유해인자는 다를 수 있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산업현장은 작업환경측정을 실시하여 근로자들에게 노출될 수 있는 유해인자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은 각 지역의 공장을 찾아 작업환경측정으로 특정된 유해인자와 근로자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직업성 질병에 대해 판정하는 일이다.
70-80년대처럼 대규모의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여전히 많은 근로자들에게서 직업성 질병 판정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나는 공장으로 출근하는 의사이다.
의사를 떠올리면 진료실에서 가운을 걸친 모습 또는 수술실에서 집도하는 모습을 떠올리겠지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나 같은 의사도 있다. 페인트 냄새 가득한 공장, 목재분진, 광물성 분진이 가득한 산업현장의 임시 진료소에서 그들의 직업적 고충을 같이 느끼며 그들의 상황에 공감하며 필요하면 의학적 처치까지 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같은 의사들 중에서도 이런 업무를 하는 의사가 있다는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물며 일반인들이 알기는 매우 어렵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일하기 전 진료실에 앉아 처방만 하던 시절도 있었다. 현 상태와 환자의 답변만으로는 직관적으로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힘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든 건강한 사람은 다수의 시간을 근무지에서 보낸다. 의사인 내가 직접 산업 현장에 들어가 그들의 근무현장을 보고 직접 느낀다. 심지어 근로자들이 호소하지 않는 유해인자들을 발견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더 환자들의 상태에 공감할 수 있었고 직관적으로 많은 것들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옷에 묻은 불상의 분진들을 털어내며 가끔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지만 훌훌 털고 샤워하고 나면 보람만이 남는다. 나는 의료 사각지대에서 고립될 수 있는 근로자들을 찾아내고 발견해서 치료까지 할 수 있다. 그런 보람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들뜬 마음으로 이른 새벽 공장으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