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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된 이유

 내가 조그만 섬에서 의사로 일할 당시였다.

1000명 남짓 사는 섬대부분은 60세 이상의 노인이었지만 주말이면 거리를 걸어 다니는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피부색은 좀 달랐다. 그들은 섬에 들어와서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내가 있던 섬에는 김양식, 활어 양식을 하는 곳이 많았다. 많은 육체적인 노동을 요구하는 일을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이 할 리가 없다. 그래서 20대의 건강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좀처럼 마주치기가 힘들었는데 주중에는 일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주말에는 섬을 나가느라 바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진료실을 방문할 때면 위로의 말 던지곤 했다. 그리고 섬 진료실이라고 전혀 후진 진료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 최선을 다해 진료했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 중에서는 합법 체류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색안경을 쓰고 봐서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50% 이상의 노동자들은 비합법 체류자였다. 그들이 아프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국가보험이 없으니 일반 진료를 본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4,500원이면 될 진료비를 그들은 20,000원 넘게 낸다.

별 수 없다. 그들은 신분상 불이익을 받을까 극도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을 꺼렸다. 최대한 참으며 웬만하면 나타나지도 않는 그들이었다.


 한 번은 배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팔에 수건을 감고 들어왔다. 배에서 내리는 닻의 밧줄에 팔이 감겨 한쪽 팔이 찢어진 것이었다. 정말 아플 텐데도 멀리서부터 들어 꺼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고용주로 보이는 70대 할머니는 젊은 외국인 노동자를 끌고 와서 빨리 꿰매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섬 진료실에서 치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신경학적 검사를 해보니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까지 일부 손상 된 것으로 보였고 근육층까지 찢어져 출혈이 심했다. 나는 재빨리 생리식염수를 달고 닥터헬기를 부르려고 했다. 그러자, 사장과 외국인 노동자 모두 질색했다.


"선상님. 여기서 먼저 치료해 주고 배로 나가서 내일 치료하면 안 될까요?"

"절대 안 됩니다. 이 사람은 현재 신경, 혈관이 찢어져서 수술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아우 어떡하지.."

"병원에서 치료받는다고 불법 체류자 안 잡아가니까 닥터헬기 타고 나가세요"


 멀리서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이 마치 자기의 일인 양 인상을 쓰며 쳐다보고 있었다. 입고 있는 작업복엔 퍼런 미역류들이 덕지덕지 붙어 그전까지 어떤 일을 하고 왔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고향을 떠나 한국의 이름 모를 섬에 들어와 미역 작업을 하다 팔이 잘린 외국인 노동자. 혹시 잡혀 갈까 봐 제대로 된 치료를 거부하는 외국인 노동자와 사장. 참 답답한 상황이었다.

 나는 냉철하게 의학적인 판단만 하고 그에게 필요한 의학적 처치를 시행했다. 그리고 그는 닥터헬기에 실려 가까운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었다.


 2달쯤 지났을까. 팔에 거즈를 가득 대고 들어오는 외국인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때 밧줄에 팔이 감겼던 사람이었다. 그동안의 상황에 대해 물어보니 대학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제대로 치료는 받지 않고 돌아왔다고 한다. 응급 치료 받고 돌아와서 1달 정도 일을 하다가 팔이 욱신거려서 내원한 것이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드레싱을 해주고 필요한 약을 처방해 주는 것뿐이었지만 섬에서 외롭게 아프며 꾹 참지 말라고 언제든 아프면 찾아오라고 일러주고 보냈다.



 이처럼 의사들이 진료를 보다 보면 나의 딜레마의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학적인 것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법적인 것을 우선할 것인가? 나는 의학적인 것을 우선한다. 그럼에도 신분상 약점이 있는 그들은 좀처럼 진료를 보려 하지 않는다.


 비단 외국인 노동자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의료 취약지였던 섬에 힘들게 일하며 고생하면서 아픈 곳을 제대로 치료 받지 않는 사람들 많이 보았다. 3D 업종에서 건강을 해쳐가며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가기 시작 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미 다치거나 질병에 걸려서 온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사고가 나기 전, 질병에 걸리기 전 예방을 도와줄 수 있는 의사, 바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되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모교의 대학병원으로 돌아와 인턴생활을 시작하였다. 인턴일을 하다 보면 대학병원의 모든과 환자들을 접하게 되고 의사 인생에서 더 이상 할 수 없는 경험들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새벽 3시에 하품을 해가며 CT를 찍기 위해 환자 앰부백 (수동 산소마스크 같은 것)을 짜면서 환자와 단둘이 촬영을 가거나 각 병실을 돌며 환자들의 상처부위를 드레싱 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렇게 환자들과 오랜 시간 있게 될 때 따뜻한 말로 그들의 아픔을 어우러 주려고 노력했다. 병원이라는 낯선 곳에서 몸까지 아파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의사 가운 입은 사람이 따뜻한 말을 건네면 차가웠던 마음이 조금 따뜻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다가 직업에 대해서 물어보면 '아하 그렇구나' 하고 단박에 이해될 때가 있었다.

 기침을 연신 하는 비흡연자가 30년 동안 채석장에서 일했다는 이야기에서 광물성 분진에 의한 폐질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던지. 건강검진 상담을 온 분이 항공기 조종사라고 하자 교대근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느냐부터 오래 앉아 있어서 소화불량이 있거나 자외선으로 인한 눈부심 또는 안구충혈이 잦지 않냐고 물었는데 조종사는 그렇다며 마치 나를 명의처럼 쳐다보는 순간도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직업력을 묻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직업환경의학과에 소속되기 전 인턴을 돌면서 많은 환자들을 경험하며 느낀 건 그들의 병에 직업이 아주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들의 질병을 이해하는데 직업력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유일하게 아프지 않은 사람을 보는 과. 병에 걸려 치료하기 전 예방에 힘쓰는 과. 어쩌면 이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고 중요한 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인턴을 마치고 모교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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