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⓵-(4) 우유공장에서 초코링 먹는 의사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우유 공장을 방문했다.


 큰 공장답게 2000명이 넘는 근로자가 있었고 이는 우리 병원과 계약 맺은 가장 큰 사업장이었다. 큰 사업장의 장점이라면 사내에서 보건관리를 하는 전문 인력이 있어서 병원과 소통하기 쉽고 또한 사후관리도 용이한 점이 있다. 물론 병원 입장에서도 큰 수익이 되기 때문에 작은 사업장보다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다른 곳의 출발 시간이 AM 06:00 쯤이었다면 이곳은 AM 05:00에 출발해야 했다. 야간 근무자들이 있는 건 다른 사업체와 다를 바 없었지만 검진자 머릿수로 계약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밀어붙이는 일종의 갑질(?)이었다.


 큰 사업체들을 검진하는데 의사로서 또 한 가지의 애로사항이 있다.

 바로 눈치보기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사업체의 유해인자로 인해 산업재해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게 특수건강검진의 목적이지만 실상 사측은 그러한 사람이 생기는 것을 굉장히 꺼려하고 또 뒤에서 몰래 압박을 주기도 한다. 특히, 병원 입장에서 수익이 되는 큰 사업체에 D1(직업병 소견), C1 (직업병 요관찰자) 등의 판정을 내리거나 야간근무제한 또는 근무중단 등의 조치를 다음부터는 계약이 끊길지도 모른다. 이것이 특수건강검진 제도가 가진 가장 큰 한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원에서 영업하는 사람들도 의사의 판정에 사사건건 관여해서 판정을 바꿔달라던가 (계약이 끊기면 다시 따내야 하니까...) 심지어 사측에서 더 이상 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의 계약구조상 병원은 사업체에게 돈을 고 계약한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영세한 병원일수록 사업체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고 의사 또한 병원의 월급을 받는 봉급쟁이로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순살아파트로 조롱받으며 부실 건설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되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부실 건설을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고 시정 요구를 해야 하는 감리제도가 우리 특수건강검진과 비슷한데 이들도 시공사 즉 발주처의 눈치를 보느라 시공 과정에 문제가 있어도 시정명령을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다른 분야인 것 같아도 문제가 생기는 데는 결국 비슷한 구조적인 문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대학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큰 눈치를 보지 않고 의학적인 판단에 따라 엄격하게 보려고 노력한다. 가끔 판정과 관련하여 외압(?)이 들어올 때도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객관적인 의학적 판단을 제시하며 그들을 설득한다. 그것이 정도(正道)라고 생각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졸린 눈을 비비며 도착한 어느 시골의 대형 우유 공장. 이미 야간 근무를 마친 근로자들이 검진 시작 전에 줄을 서서 대기 중이었다.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이 도착해서 자리를 잡자 보건관리자로 보이는 사람이 돌아다니며 이곳에서 갓 생산된 흰 우유와 커피 우유를 놓고 나간다. 식품 공장들의 검진을 다니면 받을수 있는 혜택이다. 생산일자가 어제 날짜로 찍혀있는 흰 우유를 따서 마셨더니 고소한 풍미가 가득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기분 좋게 검진을 시작했다.


 이곳은 사전에 방문해서 공정을 구경할 수 없었다. 위생 및 보안 등의 이유로 출입을 막았지만 대부분의 공장이 하는 변명이고 혹시나 안 좋은 것이 발견될까 하는 걱정에 그러는 것이었다. 공정 과정을 구경하고 검진에 참여하면 확실히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어서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이곳은 몇십 년간 철옹성처럼 굳게 닫힌 성과 같았다. 결국 근로자들과의 면담을 통해 머릿속에 그들이 하는 업무와 사용하는 기계들을 상상하며 검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젊은 남성이 머리가 하얘져서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 남자의 머리색을 보지 못했는데 조용히 내게 다가와 귓속말로 "산재가 의심되는데 저 말고 다른 5명도 그래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그 사람의 머리 앞 뒤를 보니 하얗게 탈색돼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냐는 질문에 몇 달 전 새로운 세척과정에 참여했는데 그 팀의 모든 사람의 머리가 이렇게 새하얗게 탈색된 것이었다. 다행히 어지럼증이나 피부 증상등은 없었고 머리색만 바뀐 것이지만 의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근로자 입장에선 매우 속상했을 것이다.

 이 근로자가 노출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질들 중엔 여러 화학물질이 있었으나 탈색을 유발할만한 물질은 보이지 않았다. 근로자에게 물었다.


"혹시 세척과정시 냄새가 심하거나 추측되는 물질이 있을까요?"

"네. 아세톤 냄새도 나고 과산화수소를 사용합니다"


 맞다. 과산화수소수는 머리 색깔을 변색시킨다. 그래서 농도를 희석해 미용실에서는 탈색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다.

 첫째, 근로자가 어떤 물질에 노출되는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작업측정이 오래전 되었거나 아니면 작업측정 시 일정 수준의 농도보다 낮게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세척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탈색되었다. 또한 과산화수소수의 증기를 과량 흡입하는데 그것을 보호할만한 보호구도 지급되지 않았다.

 둘째, 다수의 사람의 머리가 탈색되면 직업환경의학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어야 한다. 그것이 부서장이든 보건관리자든. 건강한 근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같은 근로자끼리 배려하고 지켜줘야 한다. 그러나 본인의 책임이 될까 싶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전 검진을 마치고 사측에서 제공한 점심과 맛있는 초코링을 먹었다. TV 광고에서 요거트와 초코링을 먹는 게 참 신기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정말 맛있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오후 검진이 시작되고 마침 초코링 제조 과정에 참여하는 50대 남성 분을 만났다. 궁금한 점이 있어 여러 가지를 여쭤보니 이 초코링은 전 세계에서 한 회사에서만 만들 수 있어서 그 초코링을 공급하는 업체에 종속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떠나면서 하시는 말씀은 "선생님. 돈 많이 버시려면 의사 하지 마시고 초코링 개발하는 회사를 차리세요"라고 하셨다. 돈 많이 못 버는건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좋은 팁까지 알려주시는지 참 신기했다.


 며칠이 지나고 세척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검사 결과를 조회했다. 현재 이 사람들이 검사한 검사 내역에는 과산화수소 등의 물질로 인한 영향을 검사하는 부분이 빠져 있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다른 물질로 인한 건강장해는 없는지 부터 보기로 했다.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이라서 젊은 남성들은 웬만해서 피검사 결과가 나쁜 경우가 잘 없다. 세척 과정에 참여한 4명 모두 피검사 및 소변 검사상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A(정상 상태) 판정이 나가고 내 임무는 끝이 난다.


  그러나, 나는 그 근로자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의사로서는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어떤 걸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것도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라는 걸 내세워서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단 검진 상 빠져있는 물질에 대한 제대로 된 작업 측정이 필요했다. 내가 상상한 그들의 작업 현장은 큰 기계의 문을 열면 찜통을 열였을 때의 고온의 증기처럼 뿜어져 나와 근로자들의 전신에 장시간 노출 될 것 같았다. 일단 그들이 고온의 증기로 노출되는 것에 대한 보호가 필요했다. 그것들이 현재 몸에는 영향을 주고 있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사측의 보건관리자에게 말하고 지시했다. 떨떠름한 보건관리자는 알겠다는 말만 하고 끊었다. 또한, 이 해(年)는 내가 우유공장의 검진을 처음 온 해여서 이전과 판정의 내용도 상이했다. 외압에 전혀 굴하지 않고 철저하게 의학적으로만 판단해 직업병 소견을 가렸다. 이렇게 까다로운 나를 사측이 좋게 볼 리 없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 해에 그 소독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궁금해 검진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계약 담당자가 하는 말이 올해부터 그 우유공장과의 계약이 끝났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협상이 잘 되지 않고 갑질을 해서 그랬다고 했지만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검진 결과를 내 줄 검진 센터는 많이 있으니 우리 센터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몇십년간의 계약관계가 끝났다.


 우유 공장 검진 이후 남는 게 있다면 나는 그 초코링 요거트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만하면 우유공장 입장에서도 제대로 헌신해 줄 소비자 한 명을 확보했으니 성공이지 않나 싶다.



 


 

  

이전 07화 ⓵-(3) 만두공장에서 점심 먹는 의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