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⓶ 업무관련성 평가 (feat. 판사일을 하는 의사?)

 


 일반인들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 중 하나가 산재를 돕는 의사일 것이다.

 우리가 산재신청하는 피재자(被災者)들을 돕기는 하지만 산재 자체를 판정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산재인정 과정을 살펴보면 산재를 신청하는 근로자가 준비한 서류를 공단에 제출하면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는 1차적으로 산재 가능성에 대해 판단하게 된다. 질판위는 위원장 1명, 변호사 또는 노무사, 임상과 의사,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2명 등 6명까지 모여서 판정한다.


 산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크게는 사고에 의한 산재, 질병에 의한 산재가 있는데 사고에 의한 산재의 경우는 업무 기인성이 명확해서 산재처리가 빠르고 승인율도 높은 편이다. 그러나, 질병에 의한 산재는 승인율이 높지 않다. 업무에 기인해 이 질병이 나타난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거나 이전의 승인 사례가 없을 경우 질판위에서는 승인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보자.

 업무 강도가 높은 곳에서 일하던 사람이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를 했고 가족이 산재 신청을 했다고 하자. 업무 강도 또는 회사의 특정 분위기 등 업무 기인 요인이 우울증에 영향을 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쉬울까?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찾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우울증 약을 먹었다던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질판위는 산재 승인을 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승인을 거절당한 피재자들은 재심을 신청한다. 재심은 다시 한번 업무 기인성을 고려해 산재 판정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인데 대부분 이때부터 제대로 공인노무사를 대동해 서류를 준비한다. 심증적으로 '업무를 과하게 했으니 아픈 게 맞아' 라고 신청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질판위가 6인의 전문가로 구성되는 이유 또한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닌 근거 있는 산재 판정을 하기 위함이다. 그때 필요한 서류가 바로 '업무 관련성 평가'라는 것이다.


 업무 관련성 평가는 재심 또는 재심 불승인 이후 소송으로 갈 때 꼭 필요한 자료이다. 업무 관련성 평가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주요한 업무 중 하나인데 대개 불승인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접근하는 편이다.

 업무 관련성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상 질병 인정의 경우 크게 3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근로자가 업무수행 중 유해. 위험요인을 취급하거나 유해. 위험요인에 노출된 경력이 있을 것

 둘째, 유해. 위험요인에 노출되는 업무시간, 그 업무에 종사한 기간 또는 환경을 볼 때 노출 강도가 인정될 것

 셋째, 근로자가 유해. 위험요인에 노출된 것이 원인이 되어 질병이 발생했다고 의학적으로 인정될 것.


 이 세 가지에 대해 평가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그 사람이 근무한 모든 사항과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모두를 살펴보게 된다.

 유해 요인 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직업력이 가장 중요하다. 직종, 근무시간, 담당업무, 정규 작업시간, 휴식시간, 연장근무시간, 교대근무 유무와 심지어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도 알아야 한다.

 요즘 많이 신청하고 있는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는 더 세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구체적인 업무 수행과정 파악이 중요한데 필요하다면 직접 작업하는 영상을 요청하거나 진술서를 작성해 특히 어떤 작업을 할 때 어디가 아픈지 기록해 달라고 한다. 근골격계 질환은 무거운 물체를 들 때도 나타날 수 있지만 대개는 오랜 기간 잘못된 작업자세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파악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다른 경우로 유해물질에 노출된 사람이라면 업무 수행 중 노출된 유해요인과 환기 배기시설, 사측의 보호구 지급이 있었는지, 착용유무 등도 파악해야한다.


 이렇게 업무 관련성 평가를 신청하는 사람이 내게 자료를 제출하면 많을땐 내 키의 절반쯤 되는 자료를 받을 때도 있다.

 가끔 드라마에서 판사나 검사들이 나올 때 (클리쉐 같지만) 서류를 왕창 쌓아두고 밤새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도 그만큼 많은 자료를 받아 볼 때면 의사가 아니라 판사나 검사가 된 듯한 느낌 들었다.


 자료가 많다고 허투루 볼 수 없다. 그 자료들을 보다 보면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힘들게 일할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가족들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특히, 업무상 재해로 사망한 가족의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가족들을 대할 때면 남다른 감정이 들기도 했다. 아마 안타까운 사건들을 많이 볼 판사나 검사들은 매일 겪는 일이겠지 생각했다.


 꾹꾹 눌러 정성스럽게 쓴 자료들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절실한 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의학적인 논리에 따라 산재 신청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많은 자료들 중에서 필요한 내용들만 추려서 보고서를 작성하고 추가로 필요한 것들을 피재자 또는 가족에게 요청하여 받아 작성한다. 길게는 한 달 넘게 걸리는 과정이 지나면 업무 관련성 평가의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온다.


 만약 그 사람이 업무 기인성을 인정받아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업무 관련성 높음 또는 상당함이라는 문장을 쓰게 되고 업무 관련성이 떨어진다면 가능성 낮음 또는 없음으로 쓴다. 나는 업무 관련성이 떨어지면 서류를 완료하기 전 신청인에게 전화해서 관련성이 떨어질 것 같은데 계속 작성할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대부분 나타나지는 않았다.


 이 업무 관련성 평가가 재심 또는 소송에서 큰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판사또는 질판위에서 판단할 때 잘 작성된 전문가의 서류가 있다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의사는 약 처방이나 수술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생소한 일을 하는 의사도 있다. 똑같은 가운을 입지만 마치 검사나 판사처럼 서류만 하루종일 들여다보고 대단하진 않지만 판정도 내린다. 나는 이런 것들이 다른 의사들이 처방하는 약이나 수술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산재로 고통받고 있는 본인 또는 가족에게 그나마 산재 인정을 통해 위로를 받고 또 치료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이기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런 보람을 느낄 수 있어 힘들지만 이 업무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산재 판정을 돕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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