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특수건강검진을 할 당시는 아니었고 몇 년 전 일이었지만 그 병원의 특수건강검진을 갈 때면 그 사건이 생각났다. 지금보다 은폐가 쉬운 시절에는 한 근로자의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떠 넘기고 나면 시간이 흘러 잊혀지곤 했다.
물론 개인의 문제 (이별, 경제적 문제 등등)도 한 사람의 자살에 영향을 주지만 대개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업무의 과중이라던가 근무지에서의 사람들과의 갈등, 교대 근무로 인한 수면장애 등이 촉발시켜서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선행 연구들을 보면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군에서 낮은 군에 비해 우울증상 위험이 4배 증가한다는 연구도 있고 일본에서 3년간 추적 조사한 연구에서는 직업 부적당성 및 대인관계가 장기간의 우울증상의 위험요인으로 제시되었다. 즉, 직장 내 정신질환 또는 우울증상은 직업 관련 요인과 개인적인 요인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한다고 판단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인 판단인 것이다.
현재 산재보험법에 따르면 자해 행위나 자살은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는다. 다만,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저하된 상태에서의 행위로써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있으면 업무상 재해로 본다.
- 업무상 사유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한 경우
-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최근 자살 산재 승인율은 얼마나 될까? 2019년부터 2022년 6월까지 통계에 따르면 363건의 자살 산재 신청 건수 중 221건으로 약 60% 정도가 승인되었다. 이처럼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에 대한 의학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합의도 어느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병원에서의 직무 스트레스는 말할 필요도 없다. 특수 건강검진 약 180여개 항목 중 하나인 '야간근무'는 병원에서 일하는 근로자라면 대부분이 하게 되므로 야간 근무에 대한 검진을 시행하면서 추가로 직무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은지 파악한다.
야간 근무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야간만 전담해서 근무하는 야간 전담 부서, 주간-야간-비번을 번갈아 가며 근무하는 3교대 근무 부서 (대부분의 간호 병동), 공식적인 근무시간과 별개로 휴식일이 따로 없는 병원 노예 부서 (전공의 또는 인턴) 등이 있다.
직무 스트레스는 교대 근무(야간 근무)가 많아질수록 심해지고 작업시간이 길어지거나 압박 등이 심할수록 증가한다. 병원의 경우 생과 사를 다투는 경우가 많고 사소한 실수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다른 업종과 다르게 압박도 심하고 조직 내에서의 스트레스도 심한 편이다. 또한, 지속적인 야간 근무는 수면 장애를 유발하게 되고 이는 장기적인 근로자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병원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들의 야간 근무 특수 건강검진에서 직무 스트레스를 평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이 병원에서 자살했다는 간호사는 자살할 당시 직무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당시는 직무 스트레스를 따로 평가하지 않고 수면 위생 점수만을 보고 판단했는데 그 사람의 수면 위생 점수는 '매우 나쁨'이었고 우울점수도 굉장히 높은 상태였다. 다만, 현재도 그렇지만 야간 특수 건강검진에서 우울도가 높다고 해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공단에서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판정을 할 뿐이다. 그 사람은 수면 점수가 높아 Dn (야간 근무시 사후관리가 필요한 근로자) 판정을 받은 간호사였고 개인사로 자살을 한 안타까운 사람으로 알려졌다.
근로자의 건강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특히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근로자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뭘지 생각했다. 나 또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병원 내 직무 스트레스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간호사들 내부의 시니어리티라던지 특유의 압박스러운 분위기는 분명 간호사들의 정신 건강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 병원의 검진 날이었다. 모 병동의 간호사를 문진 했다. 걸어오는 모습에서 터벅터벅 힘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금방 야간 근무를 끝내고 온 간호사였을 것이다. 힘없는 목소리로 의사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며 바닥만을 응시하며 내가 질문하는 내용에 "네" "아니요"를 대답하는 간호사. 나는 다음장을 넘기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우울감이 심하신가요?"
"네.. 선생님"
"현재 우울감에 근무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근무하는 곳에서의 스트레스도 심하고 야간 근무하고 나면 너무 힘들어요"
"혹시 근무지에서 본인을 압박하는 무언가가 있습니까?"
"네.. 병동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고 아파서 병가를 내면 꾀병 부리지 말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테니 그동안 가야 했던 병원 진료 보세요"
최근 심해진 스트레스로 원인 불명의 하혈과 두통 그리고 수면 장애를 겪고 있었다. 문득 몇 년 전 자살했던 간호사가 생각났다. 20대 젊은 간호사의 청춘이 이렇게 방치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나온 혈액검사 결과 역시 좋지 않았다. 마음의 병이 심해 몸까지 나빠진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사람의 근무를 배제시키는 것이었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서 야간 근무 하는 근로자에게 내릴 수 있는 조치 중 하나가 "야간 근무 제한"이다. 당분간 규칙적인 주간 근무를 반복하면서 원했던 병원 진료도 하다 보면 우울감이 개선되고 몸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만, 대부분의 병원들은 나의 조치를 무시한다. 내가 판사도 아니고 내 말 듣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병원이 잘못되지 않는다. 병원의 보건관리자는 검진에서 나온 야간 근무 제한을 병원에 통보하고 병동에 전달해 그 간호사의 조치를 이행해야 하지만 병원의 일이란 게 야간 근무를 배제시키면 여러모로 꼬이는 문제가 많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보건관리자도 병원 내에서 힘이 없다 보니 웬만하면 조용히 넘어 가려는 것도 문제다.
그 간호사 역시 야간 근무 배제 되지 않았고 이전과 같이 근무 중이었다. 내가 전화로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 간호사의 건강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보건관리자에게 전화해서 야간 근무 제한을 하지 않으면 그 부분을 노동부에 신고하겠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간호사는 내가 야간 근무제한을 했는지도 모른채 일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귀찮으면 힘들어하는 근로자들을 구해 줄 수 있다. 나는 수시로 그 사람과 전화하며 건강은 괜찮아졌는지 야간 근무는 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제야 병원에서도 야간 근무 제한을 실시하였고 그녀또한 점차 나아지는듯 했다.
간호사와의 마지막 통화였다. 여전히 힘은 없었지만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자기를 챙겨주는 의사 선생님에게 고마워 하는 느낌이었다. 간호사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간호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동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힘들었는지 심지어 그 사람이 가해자인지 나는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의사로서 의학적으로 판단해 그 사람의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 사람은 회복되었는지 잘 근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부디 훌륭한 간호사가 되어 본인보다 더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는 의료인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