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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04. 2024

천년대분화(Millennium Eruption)

<한뼘소설> 5화

 마지막 무장 경호원 두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에이전트 엑스는 마침내 닥터 볼턴과 마주 섰다. 그의 심장을 겨냥한 라이언 하트 LH9의 짧은 총신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백만의 생명이 그녀 손끝에 달렸다. 추억은 뉴런에서 생성되는 CPEB3이라는 특정 단백질에 의해 윤색된 환영에 불과하다고 몇 번이고 읊조렸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큼 혹독한 훈련을 견디며 살인 병기로 거듭났다. 에이전트 임무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악을 제거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녀에게 감정 따위는 사치였다. 지금 이 순간 닥터 볼턴도 인류를 위협하는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일 뿐, 더 이상 과거의 스승이자 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찰랑대는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조금씩 약해지는 마음은 속일 수 없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 인간성이란 놈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 버튼에서 손 떼요, 닥터 볼턴. 지금 당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잘 알잖아요. 자칫하면 지구 전체에 위기가 닥칠 수 있어요. 지금 멈추면 당신 안전은 제가 보장할게요. 제발 멈춰요.

 빨간 버튼에서 시선을 거둔 닥터 볼턴이 허공을 응시했다. 메마른 눈빛에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로이스, 이제 에이전트 엑스라고 불러야 하나? 옛 제자만은 내 이상에 공감해 주리라 믿었는데, 배부른 돼지들의 사냥개가 되다니….” 

 “전 선량한 시민들이 온전한 일상을 누리도록 도울 뿐이에요. 당신도 도울 수 있어요.” 

 “선량한 시민이라고? 훗, 웃기지도 않는군. 돈 많은 나라들의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들과 그 멍청이들을 뽑은 바보들 말이오? 하나뿐인 지구를 망가뜨린 장본인들이지.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장님이 되는 걸 선택한 바보들. 선량하다고? 그들이 지구에 한 짓을 말해 볼까? 24시간도 부족할걸! 아직 시간이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하나뿐인 삶의 터전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와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니 제거하려고? 모두 다 한통속이야!”

 두 손을 꼭 움켜쥔 보람도 없이 닥터 볼턴의 가슴을 겨눈 LH9 총신이 자꾸 흔들렸다. 

 “움직이지 말아요, 닥터 볼턴!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해 줘요. 제 말 잘 들어요. 프로메테우스의 계산은 완벽하지 않아요. 백두산의 천년대분화가 일어나면 환태평양 일대에 어떤 연쇄 반응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백두산 마그마방에 얼마나 많은 마그마가 들끓고 있는지 알 수 없고요. 수많은 슈퍼 컴퓨터를 물리친 최고 AI라고 해도 자연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기계는 기계예요. 고작 기계에게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맡길 수 없어요.”


 허공을 헤매던 닥터 볼턴의 시선이 까만 총신을 향했다. 

 “그렇지 않아, 로이스, 우리가 함께 연구한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을 떠올려 봐. 연기 속에 포함된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흩어져 황산 에어로졸로 변했고, 이 대기층이 태양열을 반사해 기온을 일시적으로 2℃나 떨어뜨렸다고. 어디 그뿐인가. 탐보라산 분화는 어떻고. 프로메테우스는 지난 수천 년 간 화산 대폭발을 학습하고 스스로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반복했어. 인간의 인지력으로는 그 능력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고. 그는 인간의 시간을 살지 않아. 신이라고! 프로메테우스는 확신했어. 백두산이 폭발하면 3년 이내에 지구 평균 기온이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지구에 유해한 인간 따위 얼마간 사라진다면 이 또한 정의일 테지. 이 버튼만 누르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황량한 닥터 볼튼의 눈빛이 광기에 휩싸이자 에이전트 엑스는 하마터면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자…, 잠시만요. 닥터 볼턴.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IPCC의 슈퍼 컴퓨터는 백두산이 폭발하면 빙하기가 올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놨어요. 설령 빙하기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한반도와 인근 국가들이 예상치 못한 기후 변화로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 있다고 알파고 슈퍼 제로도 지적했고요. 모든 AI가 같은 결과를 내놓는 건 아니라고요. 당신 말처럼 인간은 지구에 암덩어리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옳은 길을 찾아냈어요.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거고요. 인류의 미래를 결정짓는 건 언제나 우리 몫이어야 해요. AI는 도울 뿐이라고요."  

 "우리, 우리라…. 옳은 일에는 언제나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 하나뿐인 지구를 구하는데 희생은 불가피해. 지금까지 그 희생은 가난한 국가들의 업보였지. 그럴 때는 자선 모금 몇 번으로 악어의 눈물을 짜내더니 이제 당신들 차례가 되니 날 미치광이 과학자로 만들어 제거하겠다고? 당신들은 참 세상 살기 편해. 그렇지 않은가. 이 버튼을 누르는 게 과학자이자 깨어 있는 지구 시민으로서 내 임무야. 화려한 파티는 끝났어. 에이전트 엑스. 안녕….” 


 탕탕탕!     

 세 발의 9mm 탄알이 닥터 볼턴의 심장에 무심히 날아가 꽂혔다. 에이전트 엑스는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에게 달려갔다. 마지막 숨소리가 들짐승의 그것처럼 거칠었다. 인류를 맹렬히 저주하던 악당의 얼굴은 사라지고 어느새 온화한 생태학자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거친 숨소리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과연 누가 정의일까? 에이전트 엑스, 아니 로이스?”


 닥터 볼턴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멈추었다. 에이전트 엑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조직 내 최고 에이전트답게 이번에도 크나큰 위험에서 지구를 구하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지켰다. 어쩌면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매일 뜨거워지는 지구를 눈치채지 못하듯이. 익숙한 일상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다음 날도 계속될 터였다. 그녀는 자신이 지켜낸 것이 진짜 지구의 안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구는 해마다 뜨거워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뭄과 홍수가 번번이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다. 과연 누가 정의일까. 닥터 볼턴의 마지막 질문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진 그녀의 몸이 휘청했다. 그때 스마트 글라스에 내장된 송수신기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들어도 스테인리스 같은 목소리였다. 

 "역시 깔끔하게 처리했군, 에이전트 엑스. 잘했네. 곧 우리 측 요원들이 도착해 현장을 정리할 걸세. 아지트로 돌아가 다음 임무를 기다리게." 

 "네, 미스터 제트(Z).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제가, 아니 우리가 정의입니까?"

 "새삼스러운 질문이군. 지구와 인류를 구하기 위해 탄생한 우리 조직이 정의가 아니면 누가 정의란 말인가? 본부로 복귀하면 정신 무장을 다시 해야겠군, 에이전트 엑스."

 "죄송합니다. 미스터 제트."


 에이전트 엑스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속해 있는 조직과 미스터 제트의 진짜 정체를. 미스터 제트는 CIA가 비밀리에 개발한 양자 컴퓨팅 AI 제우스(Zeus)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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