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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19. 2024

운수 좋은 날

<한뼘소설> 7화

 형일은 다리가 후들거려 새파란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사방을 꽉 막고 있는 벽처럼 하얗게 변했다. 책상 한쪽에 올려둔 자작나무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내와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작은 앞니 네 개가 앙증맞은 딸아이가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비타민이 멈춰 섰던 형일의 사고체계를 다시 작동시켰다. 그는 홀로 무대에 선 연극배우처럼 허공에 대고 쏘아붙였다. 왜 저인가요, 왜 오늘인가요, 쇠털처럼 많은 날들 중에 왜 하필…. 


 형일은 모처럼 일찍 잠에서 깼다. 휴대폰 알람을 5시 30분에 맞춰 놓았는데 거짓말처럼 5시 29분에 눈이 번쩍 떠졌다. 3분 간격으로 울리는 요란한 'The Voyage' 팝 리믹스 버전을 서너 번은 들어야 겨우 일어나는 여느 날과 사뭇 달랐다. 천근만근이어야 할 몸도 왠지 가뿐했다. 온수 온도도 적당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데 다부진 몸이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아침으로 사과 하나를 챙겨 먹고 꿈나라를 여행 중인 아내와 딸아이 볼에 입 맞추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일주일 내내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내부순환로는 오늘따라 유난히 한산했다. 라디오에선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가 연거푸 흘러나왔다. 강남에 있는 회사까지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리는 출근길이 5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디서 공돈이라도 주운 것처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아메리카노 한 잔 할까 싶어 스타벅스에 들렀는데 이번에는 무료 음료 쿠폰이 그를 맞이했다. 회사일에 치여 까맣게 잊었던 그의 생일을 스타벅스 앱이 먼저 챙겨주었다. 형일은 비로소 아침의 작은 행운들이 이해되었다. 오늘은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이다. 


 구내식당에서 나온 점심 메뉴는 형일을 포함해 직원들 모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훌륭했다. 일류 호텔 출신 셰프가 총주방장을 맡고 있는 터라 점심이 맛있기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솔직히 '소문난 잔치'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재료부터 달랐다. '우리 사장님 미쳤나 봐!'라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친 형일은 뉴욕 비건 레스토랑 'Peacefood'에 전화를 걸었다. 6개월 후까지 예약이 꽉 찼다는 AI의 안내 음성이 들려왔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10분여를 기다린 끝에 당일 취소 자리가 나왔다는 짜릿한 소식이 들려왔다. 저녁에는 아내가 꼭 가보고 싶어 하던 비건 레스토랑에서 오붓하게 둘만의 생일 파티를 즐길 터였다. 딸아이는 장모님이 돌봐주기로 했다. 형일의 얇은 입술이 자꾸만 실룩거렸다.  


 홍차 한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형일은 책상 위에서 노랑 봉투를 발견했다. 생일자를 위한 백화점 상품권인가 싶었다. 출근길에 들었던 아이돌 음악을 흥얼거리며 봉투를 연 그는 그 자리에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회사 안정화 방침에 따른 구조 조정과 조기 퇴직 신청 안내'라고 인쇄된 A4 용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야 형일은 노랑 봉투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것은 회사가 정리해고 대상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지난 6개월간 야근과 주말 출근을 밥먹듯이 해가며 회사 안정화 TFT 멤버로 활동했다. 프로젝트 이름을 '노랑 봉투'로 하자는 건 그의 아이디어였다. 월급 루팡들에게는 노랑 봉투로,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들에게는 하얀 봉투로 회사 안정화 방침을 전달하기로 했다. 학습형 인공지능이 사무 업무에 투입되면서 잉여 인력이 점점 늘어났고 회사는 더 이상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단두대를 설계하고 그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기요탱 박사처럼 형일도 자신이 진행한 프로젝트의 희생자가 되었다. 형식적으로 반론의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졌지만 소용없었다. 국내 최고의 법률 회사를 자문으로 둔 회사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해 두었다. 형일은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해맑게 웃는 딸아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내가 수줍게 둘째 임신 소식을 전했다. 오늘은 그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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