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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Apr 06. 2024

21세기 허생뎐

<한뼘소설> 13화

 허생은 신림동 고시원에 살았다. 그의 나이가 몇이나 되었고 언제부터 그곳에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사시 1차에 합격했다, 외무 고시에 합격했다 같은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했다. '출사표 고시원' 4층 가장 끝방, 햇볕도 들지 않고 환기도 되지 않는 후미진 한 평이 그의 보금자리였다. 일주일 치 먹을 양식을 구하러 편의점에 들를 때를 제외하곤 비좁은 고시원에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공기처럼 허생의 존재도 그러했다.


 어느 날 참다못한 고시원 여주인이 쪽방 절반을 차지한 모니터 앞에서 삼각 김밥을 우걱우걱 씹어 넘기는 허생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고시 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맨날 틀어박혀 있으면 어떻게 해! 아직 한창나이인데 몸 쓰는 일이라도 구해야지.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쯧쯧쯧."

 "몸 쓰는 일은 서툴러서요."

 "그럼 기술이라도 배우든가!"

 "문과 출신입니다."

 "출사표 고시원 VIP한테 오죽하면 이런 말 하겠어? 뭐라도 해야지, 장사라도 배우던가!"

 "자영업 절반이 문 닫는 시대입니다. 사장님도 잘 아시면서."

 "아이고, 정말 젊은 사람이! 부모님 생각도 좀 해야지. 언제까지 자식 뒷바라지로 고생시킬 거야? 당장 나가, 나가서 뭐라도 하라고 쫌!"

 "아깝다! 1 BTC가 1억 원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이제 9천3백만 원인데······."

 

 허생은 가상자산 플랫폼 빗썸에 로그인해 소유하고 있던 비트코인을 전량 매도 걸었다. BTC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유입으로 인한 상승 모멘텀 덕분에 거래는 단번에 체결되었다. 그가 소유하고 있던 비트코인은 모두 200 BTC, 체결 금액은 약 186억 원이었다.


 종잣돈을 마련한 허생은 휴대폰을 들었다. 5년 전 옆방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OO군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후 허생은 종잣돈 전부를 OO군 변두리 땅을 매입하는 데 사용했다. 6개월 후, 그 땅의 가치가 무려 열 배나 뛰었다. 고속도로 종점이 허생이 매입한 OO면으로 변경된다는 뉴스가 속보로 뜬 지 열흘만이었다. 친구 몫으로 10%를 떼어주고도 허생이 보유한 자산은 천육백억 원을 훌쩍 넘었다. 


 허생은 자산의 절반은 농수산물 선취에, 절반은 OO 주식을 매입하는데 투자했다. 정부의 강력한 물가 안정 대책에도 농수산물 가격이 폭등했다. 사과와 배, 대파 가격이 연일 최고가를 기록했다. 대표이사가 유력 정치인의 대학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매입한 OO기업의 주식도 한 달 사이 무려 5배나 뛰었다. 그렇게 1년 만에 허생의 자산은 천문학적인 액수가 되었다. 2년여 만에 신림동으로 돌아온 허생은 고시촌 인근 땅을 사들였다. 그가 부동산과 주식 투자의 숨은 고수라는 소문이 강남 부자들 사이에 자자해 투자자들이 연일 신림동 출사표 고시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자본주의 민낯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더 큰돈을 굴리면 가진 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 가난해질 게 분명했다. 허생은 멈춰야 하는 순간을 알만큼은 현명했다. 그는 자신의 자산만으로 출사표 고시원 일대를 개발했다. 낡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언제나 화재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고시촌이 자연친화적인 녹색건물로 탈바꿈했다. 


 허생은 'Green Vally'라는 별명을 가진 건물들을 청년을 위해 내주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신림동 고시원 한 달 이용비를 받았다. 청년들에게 50만 원은 적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청담동처럼 품격 있고 성북동처럼 자연 친화적인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분명 큰 혜택이었다. 게다가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한 영양가 풍부한 아침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되었으니 Green Vally는 언제나 청춘들로 가득했다. 허생은 더 이상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가 아니었다. 청년들의 희망이 되었다. 일부 언론은 그가 헬조선에 속박된 청년들을 구하러 온 메시아라고 칭송했고, 또 다른 언론은 그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대형 커뮤니티에서는 그가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설왕설래했다.    


 허생은 관악산에 올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역설적이지만 참 아름다웠다. 허생은 자신이 단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지 않고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때로는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했다. 그는 묘한 미쇼를 지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날아갈 것 같았다. 허생은 멈춰야 하는 순간을 알만큼 현명했다. 


 그날 이후 허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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