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도 없이 신과 헤어진 아침, 나는 메인 바자르의 어느 빵집에 있었다. 어두운 홀에 테이블이 네 개. 메뉴판에는 영어와 힌디어뿐이었다. 온갖 생소한 음식들 가운데 익숙한 크로와상과 파인애플 주스를 찾아 주문했다. 카레도 탄두리도 아닌 특색 없는 음식이 인도에서의 첫 번째 식사다. 장시간 실온에서 수분을 빼앗겨버린 퍽퍽한 빵에 새콤한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켰다. 빵이 소화되어 아래로 내려가기도 전에 구역감을 느꼈다. 몸이 음식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음식 '알레르기'는 닷새가 지나도록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용감하게 다양한 맛에 도전하는 대학 동기와는 달리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가공되거나 위생적인 것만을 선택하려 했다. 나에게 가공되지 않은 것은 '날것'이나 다름없었고, 날것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었다.
인도의 드넓은 땅 위엔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다채로운 맛과 향기가 있다. 그들의 음식에는 독특한 영혼과 지역의 특색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가 맛에 대한 감탄사를 결정한다. 어떤 날은 그 맛이 조금 짰고, 가끔은 너무 싱거웠다. 그리고 대부분의 맛은 마살라처럼 아주 복잡하고 미묘했다.
인도에는 ‘마살라’라고 불리는 특유의 향신료가 있다. 강렬한 마살라의 맛은 눈이 땡그란 인도인들 만큼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머리가 띵 해질 정도로 짜릿한 마살라 속 영혼이 내 혀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가공되고 정제된 것에 길들여진 나의 영혼을 자극했다. 그건 마치 "이런 춤 알아? 함께 추자!" 하며 나에게 알 수 없는 춤사위를 가르쳐 주는 것과 같았다. 완강히 거부하던 내가 마지못해 혀를 움직이며 따라 추는 것이었다. 그 춤이 생소하여 구역질이 나더라도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나는 여행기간 30일 중 단 하루도 복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계속해서 아리고 미세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정확히 그게 무슨 병인지는 모른다. 복통의 원인이 위생문제나 마살라 때문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할 뿐.
나는 어떻게든 그 땅에 길들여져야만 했다.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들이 제공하는 것을 믿어야 했다. 계속해서 복통을 느낄 것이란 사실 또한 받아들여야만 했다. 편식은 불가능했다. 나에겐 소화시켜 힘과 근육을 만들어 낼 '밥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연습을 했다. 가공된 20대로부터 유년시절의 와일드함을 천천히 끄집어내고 있었다. 당장은 소화시키기가 끔찍했지만 조금씩 시도했다. 그렇게 차츰 식당의 메뉴들에 도전했고 마살라에도 길들여질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린 시절처럼 마냥 철없이 굴거나 꿈만 꿀 수는 없는 나이였다. 그토록 기대하고 기다렸던 20대가 되었지만, 정작 청춘은 내 비위를 거스르기 시작했다. 정제되고 가공된 것들에 길들여지는 사이 유년시절의 와일드함은 차츰 지워져 갔다. 세상이 정해 놓은 길, 때로는 화려한 길만을 쫒으려 했던 편협한 서울살이는 망가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밸런스를 완전히 놓쳐버린 나는 인도로 도망쳤다. 하지만 인도에서 ‘죽음’이라는 괘씸한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죽음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고 삶은 예상보다 더 강했다. 나는 편식을 멈추고 밥을 먹어야만 했다. 노동에 던져지고 세상의 불합리함을 배우는 것이 20대의 밥다운 밥이었음을, 머나먼 인도 땅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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