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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esa Aug 01. 2021

오사카 신



그는 한눈에 보아도 일본인이었다.  미세한 동양의 종족 차이를 나는 금세 구별해   있었다. 델리 국제공항의 환전소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 그는 불시에 나를 돌아보며 뉴델리 역으로 가는 방법을 아느냐고 물었다.  역시  방법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알은체를 했다. 떨리는 그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를 놀라게  것은 진한 향신료의 내음뿐만은 아니었다. 낯선 인도의 흥정꾼들이 공항 바로 밖에서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굶주린 호랑이처럼 그와 나를 맹렬히 주시했다. 호랑이  속에 들어가더라도 하나 보단 확실히 둘이 나았다. 우리는 뉴델리역을 지나 여행객들의 성지인 빠하르 간지로 가는 여정 위에 있었다. 나는 가이드북을 펼쳐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여기  페이지에 뉴델리로 가는 방법이 나와 있네요."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흥정꾼들을 따돌리고 겨우 버스에 올랐다. 석양이 뜨겁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차창밖은 어둑해졌다. 인도의 밤은 낮과는 너무도 다른 표정으로 동양의 두 이방인을 맞이했다. 도로 위의 엄청난 굉음과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불빛은 이따금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기도 했다. 소음 때문인지 그는 피곤한 기색으로 차창 밖을 바라봤고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각자의 방식대로 낯선 밤에 적응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 가량을 달려 뉴델리 역에 도착한 뒤, 최종 목적지인 빠하르 간지까지는 도보로 이동했다. 몸집 만한 나의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며 갈길을 재촉했다. 비포장도로, 지릿한 악취, 강한 향신료, 우거진 풀, 생소한 언어, 소, 들개, 이따금씩 환영 인사처럼 들었던 “be careful!" 같은 경고들. 날것의 인도는 위태로웠고, 우리는 아슬아슬한 밤을 걷고 있었다.


빠하르 간지 거리는 9회 말의 스타디움처럼 요란하고 시끄러웠다. 여행객과 상인들은 서로의 홈런을 위해 언성을 높였고, 긴 비행에 이어 낯선 밤길을 걷느라 우리의 체력은 완전히 바닥이 나버렸다. 거리에서 흥정을 하던 어느 노파의 손에 이끌려 무작정 숙소부터 잡았다. 나와 그의 객실은 양 옆으로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그곳 <호텔 바즈랑>에서 나는 첫 번째 여행 일기를 썼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별 도움도 안 되는 로밍폰으로 대학 동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어 조차 불가능해 영어로 알음알음 보내야 했던 메시지. 델리에서 만나자는 말만을 남긴 채 먼저 여행길에 올랐던 그녀다. 나는 숙소의 이름과 위치를 대충 적어 보낸 뒤 핸드폰을 침대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눈을 감고 윙윙 돌아가는 환풍기 소음을 BGM 삼아 잠시 안정을 취했다.


다시 불현듯 그가 나의 방문을 노크했다. 내 상태를 확인했고, 생수가 떨어졌다는 핑계로 산책을 제안해왔다. 우리는 숙소 근처의 슈퍼에서 커다란 생수 두 개를 구매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며 그에게 빌렸던 돈을 되돌려 주었다. 도로 위 소음 탓에 잠시 끊겼던 대화를 슈퍼 앞에서 이어나가기도 했다. 아쉽게도 대화의 대부분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렸지만. 낡은 여행 일기장을 펴고 서야 그와의 동행을 겨우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거리 어디에선가 우연히 대학 동기를 만났던 기억 또한 복원해 낼 수 있었다. 알음알음 보낸 문자를 지표로 나를 찾아 거리로 나섰던 그녀. 서로의 숙소는 다행히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그날 나는 바즈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이튿날 그녀가 있는 숙소로 옮겨 갔다.


생수를 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델리 투어를 약속했다. 낙타 투어도 약속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내가 그의 객실 문을 두드렸을 때엔 이미 새벽녘에 떠나고 없었다. 가벼웠던 만큼 약속은 쉽게 깨어졌고, 나는 너무도 쉽게 그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서울을 떠나온 이래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 요란 법석한 도로를 함께 달리고 버스 요금을 대신 내어 주었던 사람. 북적이는 뉴델리역과 빠하르 간지 거리를 함께 걸었던 나의 동지, 신. 오사카의 이방인 신. 신이라는 그 이름처럼, 그는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동지가 되었고 나를 도왔으며 고요한 새벽에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를 잊고 살았다. 환전소 앞에 길게 줄을 섰을 때 보았던 그 작은 뒷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신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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