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와 벌과 꽃 -
이른 새벽, 아침 이슬이 나를 반긴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 오면 어둠 속에 가려졌던 거미줄이 보인다. 새벽이슬 때문이다. 거미줄은 새벽이슬이 있어야 비로소 줄이 선명하게 보인다. 맑고 깨끗한 곳에서만 사는 거미는 요즘 보기 드문 곤충이다. 그런 녀석이 우리 집 소나무에 거처를 마련하고 지내고 있다. 난 솔나무 밑을 지나간 것뿐인데 내 얼굴에는 희고 투명한 줄이 감긴다. 거미는 오후 늦게 먹잇감을 기다리며 자신이 판단한 제일 안전한 곳에 줄을 쳐 놓는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거미줄 사이로 벌 한 마리가 언뜻 보기에 공중부양하고 있는 듯 허공에 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미가 친 줄에 벌이 온몸이 휘감겨 있다. 옴짝달싹 못하는 것을 보니 죽은 것 같았다. 그런 벌이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거미에게는 먹을 양식이 필요했겠지란 잠시 스치듯 든 생각 사이로 자연 안 생태계에는 먹고 먹히는 관계들을 보면 결국 생존에 의한 것이지만 때론 그 모습이 잔인하기도 하고 애잔해 보이기도 한다.
벌도 꿀 따러 꽃을 헤집어 놓기도 하고, 헤집힌 꽃은 금방 시들기도 한다. 꿀벌이 힘들게 모은 꿀은 달콤한 차로 마시기도 하고, 자연산 천연산의 명찰을 달고 값비싸게 팔려가기도 한다. 사람이 누리는 맛의 향연은 남모를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입고 먹고 갖고 있는 것들이 자연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물건 하나, 먹을거리 하나도 쉽사리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
우리 집 뜰에 심어 놓은 꽃들은 자주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동네 벌들에게 소문이 났는지 꽃들 주변에 서성이기만 해도 벌들이 종종 꿀 따러 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마다 활짝 핀 꽃을 헤집어 놓은 벌들이 얄미웠다. 나는 조금 더 예쁜 꽃을 보고 싶은데 꽃이 벌과 만나면 꽃은 금방 시들고 열매로 변하는 것이 아쉬웠다. 꽃은 열매를 얻기 위해 아름다움을 잃고 만다.
‘꽃은 왜 피운다고 말하는 걸일까.’
식물과 나무들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일에 곤충을 끌어들인다. 식물꽃은 곤충의 환심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보상을 준비하게 된다. 가장 큰 보상이 바로 꿀과 꽃가루이다. 꿀뿐만 아니라 꽃가루 역시 곤충들에게는 훌륭한 양식이다. 그런데 어떤 욕심 많은 중매쟁이는 꽃가루를 너무 많이 가져가 꽃을 버겁게 하기도 한다. 곤충계 중매쟁이의 대표인 벌을 활용하는 꽃들은 꽃 끝에 꿀샘이 있다. 벌은 이 꿀을 얻기 위해 꽃을 찾아온다. 벌은 단물을 먹기 위해 연신 주둥이를 꽃 끝에 들이밀며 단꿈에 빠진다. 그렇다고 꽃이 일방적으로 벌에게 꿀만 제공하진 않는다. 꽃은 벌에게 꿀을 제공하는 대가를 받는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로 만나듯이 암술과 수술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중매쟁이가 되어준다.
그렇기에 ‘꽃은 좋은 향기를 피워 달콤한 촉각으로 벌을 유혹하는 것은 아닐까.’
열매를 맺기 위해 ‘향기를 피워야 하기에 꽃을 피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꽃과 벌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힘을 모아 상생과 경쟁의 관계를 구축한 사이다. 한데 벌과 거미의 관계 속에서는 벌이 먹잇감이 되는 것을 보니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내 마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길래 사물을 보는 시선에 따라 그가 처한 환경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자연 속 생태 관계는 늘 일방적이지 않다. 때론 강자가 약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약자가 강자가 될 수 있구나!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