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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동원 Apr 27. 2022

보이 그룹의 등장과 홍콩의 꿈

3부, 날줄, 전민조성 (2)

 “전민조성”이 크게 인기를 끌자, 프로그램의 프로듀서였던 웡와이관은 참가자들을 조합하여 MIRROR라는 아이돌 그룹을 구성한다. 총 12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그해 바로 홍콩 최대 음악제 가운데 하나인 “질타(叱咤)”의 최고 인기 그룹 부문 수상 후보에 드는 기염을 토한다. 이에 홍콩의 민주 성향 언론이었던 더 스탠드 뉴스는 “이 시대의 홍콩에서 스타가 되고, 스타가 만들어지는 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전민조성”과 MIRROR의 프로듀서인 “화제” 웡와이관(“花姐” 黃慧君, “화저” 황혜군)과 인터뷰를 진행한다. 웡와이관이 MIRROR라는 아이돌 스타를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한 내용을 옮긴다.   

  


 그녀가 앤디 후이(Andy Hui, 許志安, 허지안)의 콘서트를 기획하건 어느 날이었다. 집에 돌아오자 큰 아들이 노래를 듣고 있는 게 보였다. 이에 그녀는 혹시 “앤디”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아이가 한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다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제야 “사미(Sammi Cheng, 鄭秀文, 정수문)의 남편이었나?”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될 뿐이었다. 그녀는 꽤 놀랐다. 이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비교적 젊은 가수들인 제이슨 찬(Jason Chan, 陳柏宇, 진백우)이나 파코 차우(Pakho Chau, 周柏豪, 주백호)로 시험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 “다 몰라.” 이어서 작은 아이에게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내게 자기 핸드폰을 보여주었어요. 내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중국 대륙의 그룹들이더군요.” 그녀는 놀랐고 또 슬퍼하였다. “음악 이야기조차 아이들과 통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죠?”     


 그녀가 기억하기에 이전의 젊은 홍콩인들은 이 같지 않았다.     


 소녀 시절의 그녀가 좋아했던 이들은 앤디 라우와 레슬리 청이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경가금곡(勁歌金曲, 한국의 뮤직뱅크에 해당)”이었다. 19세에 TVB에 들어가고서 인턴 때는 분명히 편집 기사였지만, 업무를 배정받을 때는 “경가금곡”의 막내작가가 되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는 동시에 90년대 홍콩 연예계의 휘황찬란한 시절의 끝과 함께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 시절의 가수들은 정말 매력 있었죠. 옛날엔 지금 같은 인터넷의 무언가도 없었기에, 팬들과 스타의 거리도 멀었는데 신비하기도 하고 너무나 높아 보였어요.” 스타들의 기세는 늘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샌디 람을 보았을 때, 두 걸음인가 물러났죠. 이 사람 대단하다 느꼈어요.”     


 모두 지난 일이다. 90년대가 지난 후 홍콩 대중문화는 점차 몰락했다. 영화 티켓은 팔리지 않았고, TV를 보는 사람이 없었으며, 앨범은 더욱 아무도 사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들과 같은 새로운 세대는 점차 홍콩산 미디어 컨텐츠와 선을 긋고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 대만 심지어 대륙의 아이돌 스타에게 눈을 돌렸다.     


(…)     

프로듀서 웡와이관, "전민조성" 중 캡처

 “사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스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이 이야기는 "전민조성"의 제작자가 말하기엔 조금 풍자적이다. 그녀가 설명하길, “스타 만들기”는 그저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자고 사장에게 유세할 때 쓴 단어였을 뿐, “슈퍼스타”나 “프로듀스 101”과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참가자들이 “꿈을 향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쇼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녀가 제작했던 “솔로 탈출 프로세스(脫獨工程)”나 “버텨봐 자기(慳 D 啦 Honey)”처럼.     


“원래는 조금은 바보 같은 생각들이더라도 꿈을 좇아가는, 그리고 어떻게 좇아가는지를 보는 프로그램을 찍고 싶었어요. 다들 비록 이 시대에 (스타 되기와 같은) 그런 것들을 하려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바보 같게도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매달리고 있어요.” 이게 그녀의 본래 뜻이었다.     


 그러나 경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기 넘치던 프로듀서는 점점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전민조성"에는 99명의 참가자가 있었는데 첫 라운드에서 절반을 떨어뜨려야 했다. 참가자들은 위온온(余安安, 여안안) 등 다섯 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무대를 선보이고서 어떤 이들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성공하고, 어떤 이들은 떨어졌다. 떨어진 참가자들은 무대를 마친 뒤 직접 짐을 챙겨서 복도를 지나 후문으로 떠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문밖에서 울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녀는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마음이 정말 아팠어요. 들어가서 계속 영상을 보아야 하는데 그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어요. 어쩔 수 없이 계속 영상을 보면서 계속 소리 질렀죠.”     


 패기 넘치던 프로듀서는 프로그램의 원래 의도를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이 경연이 끊임 없이 누군가를 떨어뜨린다면서 10강에 가고, 최종승자를 낸다고 해도, 우리 방송사가 만약 그들이 계속 나아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렇게 이 프로그램이 끝난다면 그들도 끝나고 만다.” 그녀는 끝내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 “내가 이 프로그램을 위해 그들을 이용해 놓고서도, 그들이 꿈을 완성하게 돕지는 못 했던 거죠.”     


 “나는 이 사람들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하려 했어죠.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닌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죠.”     


-아궈(亞裹), ‘【Mirror 인터뷰. 上】 스타 없는 시대 속 홍콩산 보이그룹의 탄생’, “더 스탠드 뉴스(The Stand News, 立場新聞, 입장신문)”, 2018.12.05. 중 발췌.

-亞裹. 【專訪 Mirror.上】 在沒有明星的時代裡 一隊港產男團的誕生. 立場新聞. 2018-12-05.     


 웡와이관의 이야기는 한 프로듀서가 비전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스토리로 읽을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개인의 이야기보다는 홍콩 사회, 특히 현재 MIRROR에 열광하는 홍콩 청년층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더 읽을 수 있었다.      


2000년대 초, 홍콩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곡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 곡들이 세상으로부터 지켜주지 못 했고, 이러한 곡을 부른 이들도 중국으로 더 큰 돈을 벌러 떠났다.


 발췌한 인터뷰의 앞부분은 홍콩인으로서의 자긍심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홍콩인의 자긍심은 반환 이후 계속 상처입었다. 특히 경제 격차가 좁혀지고, 대륙의 부유층 관광객이 홍콩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던 것의 영향이 컸다. 어느새 상하이나 베이징뿐만 아니라 홍콩의 배후생산기지였던 선전마저 홍콩의 생산을 뛰어넘었으며 홍콩의 백화점들이 홍콩 시민보다 더 많은 돈을 쉽게 쓰는 대륙 관광객에게 훨씬 친절하게 행동한다는 논란도 일어났다. 한편, 중국인들은 홍콩인의 도시 생활이라는 자긍심도 무너뜨렸다. 많은 중국인 관광객이 홍콩에서 공중도덕을 어기는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중국에서 특정 물건에 문제가 생기면 중국인 보따리상이 홍콩에 와서 해당 물건을 싹 쓸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2000년대 이어진 유아용품 파동과 2020년 초 마스크 싹쓸이가 대표적이다). 기존 생활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홍콩인들은 자신의 도시와 그에 대한 자긍심을 지키고자 했고 2012년에 중국인 자체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기까지 한다. 칸토 팝과 대중문화의 쇠락은 지난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홍콩 대중이 대륙 음악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민조성”에서도 참가자들은 칸토 팝보다는 중국 대륙 곡을 주로 불렀다. 한때 아시아를 휩쓸었던 적이 있는 칸토 팝은 홍콩인의 자긍심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홍콩 대중은 MIRROR에 자신들의 자긍심을 회복시켜주길 바라고 있었다.     


렁송항 의원(왼쪽)과 야우와이칭 의원(오른쪽)

 뒷부분은 의지할 곳이 없는 홍콩 청년층의 현실을 보여준다. 전민조성 참가자들은 성공 가능성이 적음에도 꿈을 꾸고, 그것을 좇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민조성과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꿈을 실현할 방법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홍콩 청년층의 모습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적인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꿈을 꿨다. 세계적인 흐름에 부합하여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꿈. 그것이 국제도시로서 홍콩이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고 더 좋게 홍콩을 도약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친중 정당과 결탁한 기업들의 유착을 해소하는 등 자신들의 의견이 개진될 기회를 얻는다면 삶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어떤 정치 세력에도 의지하기 어려웠다. 기존 민주파 정당인 민주당이나 공민당은 계속 정부와 친 공산당 정당들에게 밀렸다. 선거 구조 자체를 개혁하려는 시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2014년 홍콩 시위에 연대하는 척했지만, 지도부는 입법회에 계속 앉아있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기 전의 기획자 웡와이관의 모습 또한 이런 모습이다)


 그렇기에 청년 세대는 자신들의 세대 가운데서 자신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리더이자 아이콘을 만들고 싶어했다. 우산 혁명을 이끌었던 조슈아 웡(Joshua Wong, 黃之鋒)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며 많은 정치 활동가들이 그 대열에 함께 섰다. 2016년 입법회 선거에서 청년 세대는 데모시스토(Demosisto, 香港衆智, 향항중지)와 영스피레이션(Youngspiration, 靑年新政, 청년신정) 같은 정당을 직접 창당했다. 이 당들을 통해 당선된 네이선 로(Nathan Lo, 羅冠聰)와 바기오 렁(Baggio Leung, 梁頌恒), 야우와이칭(游蕙禎) 등의 입법회 의원은 모두 20대였다. 음악도 같았다. 미국 팝, K 팝 등 세계적인 흐름과 함께하는, 자기 세대 홍콩의 음악과 아이콘이 필요했다. 스타라는 꿈을 좇아가는 “전민조성” 참가자들은 사회 변화를 바라는 홍콩 청년층이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홍콩 네티즌들은 방영 초기부터 한국의 “프로듀스 101”처럼 방영 후 그룹을 결성해주길 바랐는데, 이는 단순히 K 팝을 보는 시선이 홍콩으로 옮겨간 것만은 아니다. 자기들의 아이콘을 등장시키고 싶은 홍콩 사회의 맥락이 분명히 있었다.     


  MIRROR에 투영된 홍콩인의 두 가지 바람은 그들이 빠르게 도약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본격적으로 홍콩 최고의 보이그룹이 된 것을 2020년 이후로 연기시킨 까닭이기도 하다. 2019년에는 홍콩 시민들이 정치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마지막 움직임, 범죄인인도조례 반대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의탁할 것 없이 모두 거리에 나와서 외쳤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좌절되었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는 홍콩에 대한 관심을 세계에서 모두 뺏어갔고, 홍콩 정부도 방역이란 미명으로 강압통치를 시작했다. 보안법이 제정되었고 시위 참여자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말할 자유를 잃었고 끝내 2021년 여름에는 “애플데일리(Apple Daily, 蘋果日報, 빈과일보)”가, 겨울에는 “더 스탠드 뉴스”가 강제로 문을 닫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홍콩 사람들의 홍콩에 대한 꿈은 대중문화로 돌아왔다. 그새 더 성숙하고 노련해진 멤버들은 그들의 성장 서사에 공감했던 홍콩 대중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렇게 MIRROR은 2021년 “질타”의 최고 인기 그룹 상을 거머쥐었으며 컹토는 최고 인기 가수가 되었다. 승리는 승리긴 했다. 그러나 정치로 해결하지 못하여 문화의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꿈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2019년 11월 3일, MIRROR의 데뷔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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