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라는 감정의 선물

알아차림

by 감사렌즈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어느 날, 한 남자 직원이 두리번거리다가 연세 지긋한 여성 회원에게 다가갔다.
"회원님, 대장내시경 해보셨어요?"
기구를 움직이는 중에도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


질문이 이어졌다. 아침엔 몇 시에 일어났는지, 저녁엔 뭘 먹었는지, 약은 어떤 걸 복용했는지.궁금함보다 걱정이 앞섰다. 저런 식의 접근, 괜찮은 걸까? 가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지랖이라고 다짐하며 참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이야기 중이었다.


‘대장내시경 하실 거면, 물소리 날 수도 있어요. 수도꼭지처럼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났다.
불쑥 떠오른 기억. 1년 전 그 날. 레몬그림이 그려진 봉지 가루약.20센티쯤 되는 투명한 물병. 섞으면 맛도 향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음료가 된다.
억지로 넘기다 결국 찡그려지는 표정. 그리고 몇 시간 후. 화장실 안에서 들린 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놀랐다. 인체의 신비란. 그 순간만큼은 웃음이 났고, 동시에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그 직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처음이라면 덜 무섭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에 누군가의 경험이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누군가의 불안을 눈으로 마주할 때마다, 8년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이의 어린이집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상담 받아보신 적 있으세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이 굳고, 손이 떨리고, 눈물이 맺혔다.

무슨 말을 들어야 할지 몰랐다. 며칠 후, 떨리는 발걸음으로 아동심리상담실을 찾아갔다.

“어머님, 왜 이렇게 불안하세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불안하다는 걸 몰랐다.

상담을 거부하고 싶었다.‘나는 괜찮은데 왜 자꾸 불안하다고 하지?’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상담사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문제를 인정하지 못했던 시간. 불안은 나를 꽁꽁 묶고 있었고, 나는 그걸 애써 외면했다.


그런데 불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기억이 하나씩 떠올랐다. 엄마 없이 혼자 집에 있던 밤들. 삼촌에게 맞았던 기억. 엄마가 떠난 날의 냄새와 소리. 지우고 싶은 장면이었다. 지우려고 할수록 더 또렷해졌다. 잊으려 애쓸수록 마음속에서 선명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지금의 불안은 그 시절에서 왔다는 걸. 그 아이가 느꼈던 외로움과 공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침내 그 아이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정말 많이 무서웠겠구나. 그럼에도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불안을 밀어내지 않고 바라보자, 조금씩 멀어졌다. 불안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더는 나를 삼키지 않았다.

지금은 평온이 더 많은 날들. 그렇게 감정을 알아차리는 일은, 삶을 바꾸는 첫걸음이었다. 솜털처럼 작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그 작디작은 감정 하나가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불안은 어느 날, 선물처럼 다가온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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