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식받은 음식을 앞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상헌은 먹는 둥 마는 둥 음식이 줄어들지 않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사람은 밥부터 먹어야 하는 거라며 설렁탕을 잘 들이켜지 않았나.
일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서로 다른 우주에 사는 네 명의 유상헌을 만났다. 원래 나와 친구였던 유상헌, 나에게 차갑게 대하던 유상헌, 가족에게 돌아가겠다고 나와 함께 며칠간 뛰어다닌 유상헌,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유상헌. 말하는 것도 성격도 모두 조금씩은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의 유상헌은 며칠 전 나와 함께 구신효를 찾아갔던 그보다 더 상심이 커 보였다.
“그래서, 상헌이 너 어떻게 할 거야?”
조용히 앉아 있는 상헌에게 내가 물었다.
“뭐를?”
“또 구신효한테 연락할 거 아니지? 다중우주 이동시켜 달라고.”
“아직 잘 모르겠어. 너는?”
“글쎄……. 나도 아직 전혀 모르겠어.”
이렇게 말했지만 솔직한 내 마음은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유상헌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넌 이동 안 할 거야.”
“뭐? 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다른 다중우주의 자신이랑 바꾸는 거라며. 내가 아는 신성우는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는 거 절대 못 견뎌 하거든. 이동한다 해도 맘 편히 못 살 걸.”
유상헌은 나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허탈하게 쓴웃음 짓고 있는데 상헌이 물었다.
“너, 우리 동아리에서 영화 혼자 따로 봤던 거 기억나냐?”
“야, 그게 언제 적 일인데.”
학부생 시절 상헌과 나는 함께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2주에 한 번씩 영화관에서 만나 함께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보고 온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한 번은 모임에서 문제가 생겼다. 내가 예매를 맡아서 영화표 7매를 예매했는데, 영화관에 8명이 모인 것이다. 후배 한 명이 동아리 채팅방에 ‘그날은 참석이 어렵다’라고 모호하게 말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당연히 못 온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그 후배를 빼고 7매를 예매했다. 하지만 그가 영화관에 나타나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죄송해요. 저는 오늘은 참석이 어려우니 다른 날을 더 선호한다는 의미였지, 못 온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급히 현장에서 한 장의 표를 추가로 구매하려고 했지만, 인기 있는 영화여서 남는 자리가 없었다. 10분 뒤면 영화가 시작하는 상황에, 모두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한 장을 부족하게 예매해서 생긴 일이니, 우선 나를 빼고 모두 상영관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혹시라도 취소되는 자리가 나오면 뒤이어 들어가겠다고 했다. 나만 조금 불편하면 모두가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결국 취소되는 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같은 영화는 옆 상영관에서 30분 후에 시작했고, 맨 앞 구석에 남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30분을 혼자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서 홀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30분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
“엄밀히 따지면 네 잘못도 아니었어. 그렇게 말해놓고 갑자기 참석한 그 준우 잘못 아니냐?”
“알아. 근데 어쨌든 예매를 내가 했잖아. 그렇다고 준우를 빼놓고 영화관에 들어갔으면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영화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왔을걸. 그럴 바엔 내가 따로 보는 게 나았어. 나를 위해서도.”
상헌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다. 넌 그런 사람이거든. 조금이라도 남에게 피해 줬다고 생각하면 못 견디는. 근데 그런 네가, 다른 우주 속 네 인생을 뺏을 수 있겠냐?”
“이게 그거랑 같아? 인생이 달린 일인데.”
“인생이 달렸으니까 더더욱 그렇지. 다중우주 이동하고 나면 너는 또 다른 너한테 죄책감 들어서 편히 못 살걸?”
사실 맞는 말이었다. 나 하나 행복해지자고 우주를 이동하면 수많은 나 자신이 불행할 것이고, 결국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마음도 그렇게 기울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헌의 앞에서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 성격은 변해. 그건 10년도 넘은 일이다.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지. 어쨌거나 이 우주에 있던 나도 한 번은 이동했으니까 내가 여기로 온 거잖아?”
“그래. 아마 이동을 선택한 신성우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까 성격도 변했을 수 있어. 근데 넌 아닌 것 같아. 네가 쓴 글 읽어봐도 그래. 너는 내가 아는 신성우 그대로거든.”
“그래서… 넌 어떻게 할 건데?”
“고민해 봐야지.”
상헌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는 유상헌, 너도 쉽게 이동하진 않을 것 같은데…….”
“네가 아는 나는 계속 싱글이었던 나잖아? 나야말로 네가 아는 나랑 많이 다를걸.”
유상헌의 행동은 쉽게 예상하긴 어려웠다. 상헌은 평소에 물리학밖에 모르는 것 같다가도 무언가에 꽂히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성격이었다. 가끔은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하기도 했다. 오로라를 보고 싶다며 갑자기 혼자서 캐나다로 여행을 간 적도 있고, 바닷속이 궁금하다며 갑자기 스쿠버다이빙을 배우기도 했다.
나는 상헌이 연애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런 상헌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실제로 갑자기 민주를 잃은 상헌은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다중우주를 이동했으니까.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
유상헌이 천장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미연이와도 특별한 날에만 갈 것 같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높은 천장에 근사한 인테리어가 눈을 즐겁게 해줬고, 스테이크를 굽는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하지만 나윤과는 자주 이런 곳에 왔는지, 나윤은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앉았다.
“얼마 만이에요, 우리 이렇게 밥 먹는 게? 요즘 맨날 바쁘다고만 하고……”
퇴근 무렵 나윤이 또 저녁을 먹자며 연락해 왔다. 그동안은 나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일부러 피해 왔다. 나는 곧 미연이에게 돌아갈 것이니 더 깊이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계속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이곳의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한 번은 부딪혀야 할 문제였다.
“많이 먹어. 단둘이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는 오늘을 끝으로 나윤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윤이 커진 눈으로 인상을 썼다. 미연이와 분명 닮은 외모지만 미연이에게서는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우리 관계 정리하려고 저녁 먹기로 한 거야.”
“제가 뭐 잘못했어요? 우리 요즘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아냐, 잘못은 그동안 계속 내가 하고 있었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이니까.”
나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래요. 우리 사이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쳐요. 근데요? 알고도 계속 만났잖아요. 갑자기 지금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데요? 아내분한테 의심이라도 받고 있어요?”
의심이 아니라 민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민주를 위해서도 당연히 정리해야 할 관계였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륜은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 우주에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아무리 미연이가 그립다고 해도 미연이를 닮은 여자와 이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나윤 학생. 본인은 그렇게 생각 안 할지 모르겠지만 너는 아직 어려. 인생에 경험도 부족하고. 그래서 지금 이 관계가 본인한테 얼마나 해로운지 못 느끼고 있을 거야. 아마 시간이 오래 지나고 돌이켜보면 지금을 후회하는 순간이 분명히 올 거야. 부탁이니까, 남들처럼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해.”
“저는 지금이 좋은데요? 어차피 제 선택이에요. 아내분한테는 미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 빼면 우리 둘이 만난다고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
“피해? 이게 어떻게 피해 주는 행동이 아니지? 내 아내 얘기를 하는 게 아냐. 이 관계의 대가로 넌 계속 A+ 학점을 받았고, 교환학생도 나 덕분에 당연히 선정될 거로 생각하잖아? 네 학점을 올려주기 위해 반대로 학점이 내려가야 하는 학생은? 너한테 교환학생 기회를 빼앗긴 학생은?”
나윤이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이어 직원이 음식을 가져왔다. 하지만 나도 나윤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나윤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만 쳐다봤다. 철판 위에서 스테이크 고기가 달궈지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하고 있었다.
“오늘 세미나에서 네가 그랬지? 선로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자신과 상관없는 5명을 위해 기꺼이 죽으라고 어떻게 설득할 수 있냐고. 지난번 세미나에서도 그랬지. 다른 시뮬레이션 속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행동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그런데 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건왜 그렇게 관대하지?”
“그건…… 꼭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 있어요?”
내 격앙된 말을 듣더니 나윤이 울먹거렸다. 안쓰럽고 미안했다. 잘못한 건 나였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감정을 다듬고 다시 말했다.
“성적과 상관없이 누군가의 학점을 올려주고, 교환학생을 내 마음대로 추천하고. 모두 내 신념을 거스르는 행동이야. 하지만 결국 내 잘못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까지는 책임을 질게. 교환학생도 추천해 줄 거고, 이번 학기는 학점도 잘 줄 테니까 대신 출석은 빠지지 말고 해.”
“내가…… 학점 때문에 교수님이랑 이렇게 지내는 거, 아닌 거 알잖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요?”
나윤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어차피 언젠간 정리해야 할 관계였잖아. 내가 나윤 학생보다 그렇게 많이 오래 산 건 아니야. 이건 내가 나이가 많아서 하는 얘기도, 교수로서 하는 얘기도 아니야. 다만 너보다 먼저 가정을 꾸리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하는 얘기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소중한 순간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이야.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너도 알겠지만 당연히 우리는 서로한테 그런 관계가 되어줄 수 없고.”
“……알았어요. 나, 교수님이 추천해 주면 어차피 다음 학기에 교환학생 갈 거잖아요. 그때까지만 이렇게 지내면 안 돼요?”
나윤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리고, 예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어쩌다 이 학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볼수록 더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윤을 위하는 길은 그녀와의 관계를 하루빨리 끊는 것이었다.
“아니, 이 식사가 마지막이야. 나윤 학생은 부정한 방법 없이도 실력으로 학점도 잘 받고 교환학생도 갈 수 있었을 거야. 그리고 우리 과에서 남학생들한테 인기 많은 것도 잘 알고. 이제부터라도 평범한 대학 생활을 해. 지나고 보면 이 시절을 평범한 게 못 보낸 게 후회될 거야.”
나는 나윤의 눈을 피해 옆을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부부가 한 아이와 함께 앉아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미연이와 다은이가 떠올랐다. 우리 가족이 저렇게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미연이도 알뜰한 성격이었기에 이런 근사한 곳은 자주 오지 않았다. 세 식구가 함께하는 순간이 이렇게 짧을 줄 알았다면 이런 곳에도 더 자주 오고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나 대신 그들의 곁에 있는 신성우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