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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어택 Oct 25. 2024

(29화) 9월 22일

9월 22일



 오늘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알람을 맞추지 않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 침대 옆자리에 민주는 보이지 않았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나가 보았다. 민주가 김밥을 싸고 있었다.

 

 “오빠, 일어났어?”


 민주가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가 했는데, 혹시 내가 우주를 이동한 게 아닌지 관찰하는 모양이었다. 그랬다면 나는 며칠 전처럼 혼란스러운 얼굴일 테니까.


 “나 맞아. 걱정 마.”

 “그래…… 고마워, 오빠.”

 “뭐가?”

 “어쨌든, 오늘은 그대로 있어 줘서.”


 내가 이동해도 또 다른 내가 민주 곁에 있을 거라는 편지 속 문구는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민주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어제 그대로인가 걱정부터 한 모양이었다. 매일매일 내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하며 살 민주를 생각하니 그녀가 가엽기도 했다.


 “오늘 주원이랑 놀이공원 가기로 한 날인 거 알지?”

 “으…응.”


 며칠 전에 분명 얘기하긴 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걸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을 뿐이었다.


 우리의 대화 소리에 깼는지 주원이도 눈을 비비며 걸어 나왔다.


 “주원이 깼어?”

 “응. 우와 김밥이다! 엄마, 내 거는 햄 두 개!”


 주원이가 손으로 햄을 하나 집더니 잽싸게 입에 넣었다.


 “야, 신주원! 그렇게 손으로 먹으면 어떡해! 양치도 먼저 하고 먹어야지.”

 “헤헤 오늘만. 엄마가 김밥 싸주는 거 오랜만이잖아.”


 주원이가 애교부리듯 웃자 민주도 따라 웃었다. 덩달아 어느새 내 입에도 함께 미소가 번졌다. 미연이와 함께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분명 화목한 모습이었다.


 놀이공원으로 가는 차 안에 민주가 싼 김밥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나쁘지 않았다. 미연이와 함께 나들이 갈 때는 이렇게 김밥이나 도시락을 싸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몸만 가서 밥은 그곳에서 사 먹곤 했다. 요리를 즐기는 민주와 함께 놀러 가니 색다른 느낌이었다.


 “엄마 손잡고~ 나들이 갈 때 먹어본 솜사탕~”


 주원이가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 창문을 내렸다. 가을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와 차 안을 기분 좋게 채워주었다.


 이곳은 동물원과 놀이공원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미연이와 다은이와도 함께 온 적이 있었다. 다은이는 놀이기구 타는 것을 무서워해서 항상 동물원을 위주로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원이는 남자아이여서 그런지 놀이기구 타는 걸 훨씬 더 좋아했다. 오전에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틈을 타서 놀이기구를 세 개나 탔다.

 

 “엄마, 나 저것도 탈래!”


 주원이가 롤러코스터를 가리켰다. 어린아이도 탈 수 있게끔 만든 작은 롤러코스터였다. 민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휴, 난 저것도 무서워 보인다. 둘이 타고 와. 난 여기 있을게.”

 "그럼, 아빠가 같이 타 줄 거지?" 


 민주는 밖의 벤치에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고, 나는 주원이와 함께 롤러코스터에 앉았다.

 

 “우와. 쌩쌩~ 출발!”


 주원이는 어느 때보다도 신나 보였다. 나는 키즈카페에서 주원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 주원이에게 물었다.


 “주원아. 지금도 아빠가 주원이 아빠 아닌 거 같아?”

 “응?”

 “전에 괴물이 아빠 조종하고 있다며.”

 “히힛. 모르지. 근데 괴물이 아빠 조종하고 있어도 상관없어. 난 지금 아빠가 더 좋아.”


 열차가 출발했다. 높은 곳에 오르자 밖에서 우릴 보고 있는 민주가 보였다. 민주가 손을 흔들었다.


 “엄마! 우와, 나 날고 있어!”


 주원이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민주를 보며 가벼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점심때가 되자 우리는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았다. 민주가 싼 김밥을 펼쳐 놓고 먹기 시작했다.

 

 “주원아 재미있어?”

 “웅! ”


 내 질문에 주원이가 반달 모양의 웃는 눈으로 대답했다. 웃는 눈의 모습이 민주를 닮은 것 같았다.

 

 “나 밥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을 거고, 회전목마도 탈 거고 우주 열차도 탈 거야!”

 "그래. 그래. 열심히 노세요, 신주원씨."


 민주와 내가 함께 웃었다. 민주가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주원이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나에게 고마워 오빠, 하고 얘기했다. 나는 말없이 민주를 보며 웃어 주었다.


 밥을 먹는 내내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원이 또래의 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우리 가족이 가장 화기애애한 것 같았다.


 행복하니?


 나 자신에게 물었다. 다른 모든 걸 배제하고 오늘 하루만 놓고 생각해 보자. 행복하다는 걸 부정할 수 있을까? 잔디밭에 앉아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웃으며 김밥을 먹는 이 일상. 아주 특별하진 않더라도 분명 행복했다.


 미연이와 다은이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들을 사랑하는 또 다른 내가 그 옆에 있다. 내가 그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연이와 다은이는 분명 나 없이도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는 민주와 주원이가 있다. 이들에게는 분명 내가 필요하다. 이전의 나보다는 지금의 내가 이들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나도 조금씩 행복을 찾고 있었다.


 “아빠, 나 김밥 다 먹었으니까 이제 아이스크림 먹을래!”


 주원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민주가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리켰다.

 

 “그래, 저기 있네. 같이 가 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핸드폰의 화면을 켜 보니 유상헌에게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이나 와 있었다.


 “민주야. 주원이 데리고 둘이 다녀올래? 나 잠깐 할 게 있어서.”


 민주와 주원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상헌에게 전화해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핸드폰 화면을 켰다. 그런데 그때 상헌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성우야... 이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분명 민주랑 결혼해서 살고 있었잖아. 너는 알지? 그치? 왜 내가 원룸에 혼자 있고, 다들 내가 결혼한 적이 없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거 맞지? 민주 어디 있는지 알아?」


 유상헌은 우주를 이동한 모양이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는 해변의 모래알보다도 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어.


 상헌이 어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우주를 이동하는 상헌의 행동도 어차피 넓은 우주 속에서는 사소한 일일 테니, 그는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행동은 사소하지 않았다. 내가 우주를 이동한다면 내 옆에 있는 민주와 주원이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분명 또 다른 수많은 나를 힘들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지금 행복했다.


 나는 민주와 주원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가 향하는 곳은 유상헌이 아니라 구신효였다.


 “네. 구신효입니다.”

 “신성우입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전화 주신 걸 보니…… 결정하셨습니까?”


 구신효는 기다렸다는 듯 능글맞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네. 결정했습니다. 이동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엇을요?”

 “제가 다시는 다중우주를 이동하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생각이 바뀌어서 당신을 찾아간다고 해도, 저를 이동시켜 주지 말아 주세요. 제가 계속해서 이 우주에서 살아갈 수 있게요.”

 “음… 글쎄요. 제가 확답드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 우주에서 신성우님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게 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다른 다중우주 속 신성우님께서 이곳으로 이동한다면요? 그건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군요.”


 나는 내가 결정한 이상 이곳의 인생에서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민주와 주원이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것을 구신효와의 약속을 통해 다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구신효는 그것조차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주 만에 하나라도, 또 다른 우주의 내가 이곳으로 이동해 오면 내 인생이 언제든 또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인가.


 구신효가 내 요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기분 나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결정하셨으니 축하드립니다. 그런 결정을 하셨다는 건 지금의 삶에 만족하신다는 의미로 들리는군요. 그럼, 앞으로의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구신효가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어쩌면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던 구신효와의 인연의 고리는 끝이 났다.


 민주와 주원이가 아이스크림을 사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우리, 아빠한테 달려가 볼까?”


 민주의 말에 주원이가 한 손에 아이스크림을 쥔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


 나도 주원이를 안아 주기 위해 주원이를 향해 힘껏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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