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후 어느 날
창밖에서 봄날의 햇살과 함께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볼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깼는지, 지저귀는 새소리에 깼는지 눈꺼풀이 스르르 풀렸다. 한쪽 벽을 반쯤 덮은 햇빛을 보고 기상 시간이 거의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머리맡으로 손을 뻗었다. 어젯밤에 머리맡에 둔 카드가 잡혔다. 하트 잭(♡J ). 어제 뽑은 카드 그대로인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건 유상헌이 알려 준 방법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다시 행복을 찾았다고 느낄 무렵부터, 마음속 한쪽에서 작은 두려움이 싹을 피우고 있었다. 언젠가 또 다른 우주의 내가 이곳으로 이동해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한 번은 아침에 일어났더니 민주나 전날 입었던 것과 다른 잠옷을 입고 있던 적이 있었다. 순간 나는 다중우주가 바뀌었다는 생각에 기겁한 채 주원이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혹시라도 주원이가 없거나 다른 아이로 바뀌진 않았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민주는 새벽에 물을 마시다가 옷에 물을 흘려서 갈아입은 것뿐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안도하면서 민주와 주원이를 꼭 안아 주었다.
이 이야기를 유상헌에게 했더니 그가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주었다. 매일 잠들기 전에 54장의 트럼프 카드 중 한 장을 무작위로 뽑아 머리맡에 놓고 자라는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 카드가 그대로 있다면 적어도 53/54 확률로는 어제와 같은 우주에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나는 식탁에 민주와 주원이와 함께 앉았다. 민주는 가장 잘하는 요리인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만들어 주었다. 과거에는 아침을 거르거나 대충 먹는 적도 많았지만, 주원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항상 밥을 제대로 차려 먹고 있었다. 주원이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엄마, 나 어제 수학 단원평가 봤는데 한 개 틀렸어. 이번엔 다 맞을 줄 알았는데, 계산 실수 하나 해서…….”
주원이의 침울한 얼굴을 보며 민주가 말했다.
“어이구, 하나 틀렸으면 잘했지. 초등학생 때부터 너무 백점 맞으려고 안 해도 되네요, 신주원씨.”
“주원이 나중에 커서 뭐 되고 싶은데?”
내가 묻자 주원이가 잠깐 천장을 바라보다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음… 아빠 같은 철학자?”
주원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주가 질색하며 말했다.
“뭐? 안돼! 그게 얼마나 돈도 못 버는 직업인 줄 알아? 게다가 대화할 때마다 맨날 뭐 본질이 어떻고, 절대적이네 상대적이네, 어휴 답답해, 답답해!”
“응?”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민주가 겸연쩍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아, 물론 네 아빠 얘기가 아니란다.”
나와 주원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민주가 따라 웃었다.
출근길에 운전석 창문을 내려 봄바람을 차 안으로 불러들였다. 봄에 어울리는 가요까지 켜자 차 안이 봄으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춰 서 있는데, 파란색 버스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고개를 돌려 버스를 보았다. 버스 한쪽 면을 영어 학원 광고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던 건 광고 속 다섯 명의 강사 얼굴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미연이였다. 그 뒤로 미연이가 결혼은 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가정이나 육아를 위해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미연이를 이런 식으로밖에 보지 못하지만 흐뭇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종신교수가 되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유상헌을 만났다. 한쪽으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에, 목 아래 단추 한 단을 푼 흰색 셔츠, 운동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까지. 몇 년 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난 뒤부터 외모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하더니 이전보다 더 젊어진 모습이었다.
“오늘은, 음. 교수 식당에 돈까스가 나오거든. 근데 말이야. 공학관 식당 메인 메뉴가 고등어구이인데 사이드로 미니 돈까스가 나와. 게다가 사이드 메뉴니까 여러 개 달라면 더 주기도 하고. 대박이지 않냐? 그러면 고등어구이 가격으로 돈까스까지 먹을 수 있는 거야.”
“아, 알겠어. 오늘은 공학관 식당 가자는 거지?”
유상헌의 성격은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난 좋았다. 그가 예전의 유상헌으로 돌아와 주어서.
7년 전, 내가 다중우주를 이동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유상헌은 두 번이나 더 우주를 이동했다. 나는 매번 이동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나중에는 민주가 그를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민주는 나의 아내였기에 지켜야 할 선은 있었지만, 상헌에게 종종 식사 정도는 함께하며 지내자고 했다.
몇 달간은 힘들어했지만, 유상헌도 점차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적극적으로 선을 보기도 했고, 몇 년 전에는 여섯 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작년에는 예쁜 딸을 낳았다.
유상헌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딸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성우야, 어제 채윤이가 처음으로 아빠라고 했다? 정확히는 ‘아브바’ 정도로 했는지만. 아직 엄마 소리도 제대로 안 했거든? 원래 아이의 구강 구조상 아빠보다 엄마가 발음하기 훨씬 쉽단 말야? 그래서 대부분 아기는 아빠보다 엄마를 먼저 말하는데 가끔 아빠를 먼저 말하는 애들이 있대. 그런 애들은 커서도 아빠랑 계속 사이가 좋다고 하더라.”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 외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 유상헌은 예쁜 딸에게 그 모든 걸 빼앗긴 듯 보였다. 밥을 먹는 내내 상헌은 자기 딸이 예쁘다는 자랑만 늘어놓았다. 썩 듣고 싶은 얘기는 아니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물리학 얘기로 떠드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상헌이 행복해 보여서 기뻤다.
점심을 먹고 연구실로 가는 길에 나는 학과 게시판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게시판을 천천히 살펴보는데 경조사 게시판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축결혼] 박사과정 성나윤
“교수님!”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니 나윤이었다.
“어, 나윤 학생. 안 그래도 방금 게시판에서……”
“네. 교수님 연구실에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여기 계셨네요. 이거 드리려고요.”
나윤이 내게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청첩장이었다.
7년 전 내가 이별을 통보한 후에 나윤은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교환학생에 다녀온 후에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다. 공부도 열심히 해서 자신의 실력으로도 계속해서 최고 학점을 유지했다. 이후 모교 대학원에도 진학해 나와 교류할 일도 많았지만, 나는 그녀를 철저하게 공적인 관계로만 대했다. 나윤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나윤 학생. 축하해. 그리고…… 고마워. 이렇게 올바르게 지내 줘서.”
“아니에요, 교수님. 제가 감사드려요. 그리고 죄송해요.”
나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악수를 하자며 손을 뻗었다. 나윤이 내 손을 잡으며 고개를 들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윤의 입은 미소를 짓고 지었지만,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 나도 나윤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나는 쓰던 논문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주제는 ‘다세계 해석을 기반으로 한 존재론적 고찰’이었다. 과거에 정문숙 교수님은 다중우주의 존재를 실험으로 증명하셨지만, 그 일은 지금까지 비밀로 묻어두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에도 물리학계에서도 다중우주론은 별로 진전된 게 없었다.
하지만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내 철학적 사유는 이를 배제할 수 없었다. 내가 다중우주의 존재를 발표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존재론을 연구하며 논문을 집필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주원이의 생일이었다. 나는 퇴근길에 주원이의 생일 케이크를 사 갔다. 나는 주원이와 민주와 함께 케이크를 가운데 두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주원이, 생일 축하합니다.”
주원이가 입을 모으고 훅, 하고 바람을 불자 촛불이 꺼졌다. 민주와 나는 박수를 쳤다. 식탁에는 케이크와 함께 주원이가 좋아하는 양념치킨이 올려져 있었다.
“오예, 치킨! 나 치킨부터 먹을래!”
민주가 케이크를 자르고 있는데 주원이가 허겁지겁 닭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주원아, 아빠가 케이크 사 왔는데 안 먹을 거야?”
“음, 몰라. 일단 치킨부터 먹고 배 안 부르면?”
민주가 케이크 한 조각을 올린 접시를 주원이에게 주며 말했다.
“주원아, 치킨이야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거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삐-’하는 소리와 함께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서 있는 상태였다면 넘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이 소리와 느낌은 너무도 익숙했다. 7년 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중우주를 이동하기 전에 느꼈던 그것과 똑같았다.
7년 전에 내가 다중우주를 이동하지 않기로 하면서, 약 열흘 동안 겪은 우여곡절은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 글을 쓸 이유도, 읽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날 이후로는 이 기록을 남기는 것도 멈추었다.
하지만 그때도 조금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구신효는 말했다. 다른 다중우주 속 내가 이곳으로 이동하는 건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그건 언제든 다른 우주의 내가 이곳에서의 내 인생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른 우주 속 내가 부러워할 수 있을 만큼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에 다시 이 글을 열었다. 그동안의 일을 읽어보고, 오늘의 일을 다시 기록으로 남긴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내가 다중우주를 이동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였다. 그래서 이 글은 원래 나 자신을 위한 글이었다. 갑자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또 바뀌어버린다면, 이 글을 읽으며 최소한의 이성을 다잡기 위한 장치였다. 내가 만약 7년 전에 우주를 이동했다면, 혼란에 쌓인 또 다른 내가 이 글을 읽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내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그것은 나 때문에 가족을 잃은 채 얼떨결에 이곳으로 오게 된 내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그는 내 행복한 인생과 그의 인생을 바꾸기 위해 먼 우주에서 온 존재일 것이다.
「나의 인생을 훔쳐 간 나에게」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이렇게 바꾸었다. 그리고 이 글은 그에게 남긴다. 나의 인생을 훔치기 위해 이곳으로 온 나에게.
너는 이 글을 통해 내 인생을 읽었을 것이다. 나는 한순간에 내 가족 모두를 잃었다. 하지만 나는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다시 행복을 찾았다. 네가 빼앗아 누리고 싶을 만큼의 행복을.
어쩌면 너도 가능했을 것이다. 네가 원래 살던 우주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했으니, 너도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너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내일 아침, 내 머리맡에 어젯밤과 다른 트럼프 카드가 놓여있거나 카드가 없다면, 나는 너에게 인생을 빼앗긴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힘들 것이다. 네가 버린 인생일 테니, 여기에서 내가 가진 것 중 무언가는 잃은 상태겠지. 하지만 나는 이 우주에서 그랬듯이, 그곳에서도 다시 행복을 찾을 것이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한 가지다. 이 글을 읽었다면 너는 알 것이다. 오민주와 신주원. 이들은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다. 이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다. 아마도 너는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먼 우주를 이동했을 테니, 부디,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길 바란다.
먼 우주 속 다른 곳에서 응원하겠다. 너와, 내 가족의 행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