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와인, 종로 (13분 05초)
등산, 와인, 종로라는 세 가지 단어를 포함하여 13분 05초 동안 써낸 단편 소설입니다.
아내는 참 밝고 예쁜 사람이었다. 내가 첫 번째 남자는 아니었지만 첫사랑은 맞다며 농담하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도 당연히 아내가 첫 연애는 아니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세차게 내리던 날, 친한 회사 선배가 잡아준 소개팅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좋다는 답장이 왔었다. 그렇게 종로의 어느 카페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다. 그날따라 일찍 퇴근을 하는 바람에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버렸다. 약속 시간 십분 전, 누군가 카페 문을 열며 들어섰다. 베이지색 떡볶이 코트에 연한 회색의 목도리 그리고 머리 위에 수북하게 쌓인 눈덩이들. 머리 위의 눈을 털어내며 카페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그 큰 눈으로 요리조리 나를 찾았다. 저 사람이구나. 나는 사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녀를 단번에 알아봤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오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눈 오는 날을 좋아해요. 그리고 창문 밖의 눈을 보며 치킨에 레드와인을 먹는 건 더 좋아하고요.” 그녀는 대뜸 레드와인을 참 좋아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 시간을 떠들었다. 처음 만난 날 같지 않고 오래도록 서로를 알고 지낸 듯 대화가 잘 통했다.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긴 아쉬워서, 그녀가 좋아한다던 와인바로 향했다. 자주 가는 단골 바라고 했다. 그녀가 들어서자 사장님은 창가 자리를 내줬고, 익숙한 듯 와인 한 병을 내왔다. 창밖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눈을 보며 우리는 함께 와인을 마셨다. 지독히도 쓰고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여섯 번을 더 만나고 연애를 시작했고, 6년을 더 만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몇 달 전, 사고로 그녀를 잃었다. 아직 아내의 죽음이 실감 나진 않는다. 무슨 사고였는지 소상히 말할 자신도 없다. 나는 그저 아내가 잠깐 어디 여행을 간 것 같다. 침대에 누워 아직 아내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지난해에 같이 다녀온 지리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의 추억을 회상하라면 그 자세로 하루를 꼬박 새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직 해지하지 않은 아내의 전화기가 울렸다.
“.. 여보세요?”
“네, 이금주 씨 되시죠? 어머 아니네. 남자분이 받네요?”
“남편입니다.”
“아~ 김주완 씨구나! 등산 모임이에요~ 이번 주말부터 나오시면 될 것 같고 회비 계좌는 문자로 넣어드릴게요.”
아내와 함께 신청했던 등산 모임 대기가 풀렸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등산을 참 좋아했다. 그 주 주말, 사람들과 어울려 등산을 다니고 싶어 했던 아내의 소원을 대신해 나는 처음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아내를 잃은 뒤, 참 오랜만의 등산이었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 왔을 수도 있는 이 모임에서. 사람들에게 아내는 이탈리아로 홀로 여행을 갔다고 했다. 언제 돌아오냐고 여기저기서 묻는 바람에, 얼떨결에 다음 주에 온다고 했다.
모임장은 곧바로 내 말을 끊고 대답했다. "다다음주에 같이 오면 되겠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러겠다고 하고, 백숙 닭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