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음, 결, 정적 (18분 35초)
묵음, 결, 정적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포함하여 18분 35초 동안 써낸 단편 소설입니다.
순자도 모임을 한 달 만에 참여했던 날이었다. 그래서 대화 주제가 당연히 순자의 근황일까 싶었는데, 식당에 자리를 잡자마자 오늘 새로 온 남자에게 관심이 쏠렸다. 순자는 그게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손자가 영어 유치원에 간 것도 아직 자랑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영어 유치원이 한 달에 얼마가 드는지도 말해줄 참이었다. 모임에 올 때마다 속으로 눈치 없다고 생각했던 현주네가 먼저 운을 띄웠다. 순자는 현주네 엄마가 자신을 질투하는 게 확실하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오늘 새로 오신 양반! 직업이 영어 선생님이라면서요?”
“아.. 예.”
주완이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영어’라는 단어에 새로 온 사람 따윈 관심 없던 순자가 주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틈을 타서 잘하면 손자의 영어 유치원 얘기를 꺼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인사부터 건네보려는데 자꾸 현주네가 괜히 시답지 않은 질문을 해댔다. 순자는 날도 더운데 옆에서 계속 쫑알 대는 현주네 엄마가 얄미웠다. 말을 많이 하는 건 원래 알았지만 자꾸만 밀어대는 게 문제였다.
“그거 있잖아요~ 클라.. 임? Climb. 왜 B 소리는 안 나는 거여요?”
“아… 그건 묵음입니다.”
묵음. 묵음이라는 단어에 현주네는 주완이 괜히 멋있다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옆에서 가만히 듣던 인서아빠가 주완의 말에 비아냥 거렸다.
“묵음이 뭐여? 한국에서는 한국말 쓰자고, 거 참. 한국어는 잘합니까? “
인서아빠는 꼭 이렇게 사람들 칭찬에 인색했다. 누군가는 질투가 많아서 이해해 달라고 했지만 그건 자기 사정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인서아빠가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새로 온 사람한테까지 이러니 모두가 어쩔 줄을 몰랐다. 어색한 정적이 지속돼도 아랑곳 않고 묵묵히 백숙을 먹는 주완을 바라보던 순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요즘은 글로발 시대인 거 몰러요? 글로발 하게 살아야지, 우리 손자도 이번에 영어.. “
순자는 이제야 자기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참에 아들이 승진한 것과 미국으로 출장도 자주 다니는 걸 붙여 말하려고 했다. 신나서 이야기하려는데 손자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인서아빠가 말을 끊고 빈 잔에 막걸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을 푹 담근 채 잔을 번쩍 들었다. 어찌나 가득 따랐던지 들어 올리는 과정에서 테이블과 백숙 그릇에 막걸리가 찰랑 거리며 쏟아졌다.
“글로발은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참나. 짠이나 하자고! 자 건배!”
인서아빠가 외친 건배 한 마디에 모두가 반쯤 일어나 막걸리잔을 들었다. 순자 빼고 나머지 사람들의 잔들이 가운데로 모여 세게 부딪히자, 순자의 얼굴에 막걸리가 튀었다. 분한 마음이 드는 순자가 사람들을 째려봤지만, 모두 부딪힌 잔을 얼굴에 갖다 대고 마시기 바빴다. 그때, 백숙을 먹던 주완이 고개를 들자 둘이 눈이 마주쳤다. 순자가 불끈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는 괜히 나무 테이블의 나이테 결을 따라 손으로 연신 쓸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