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노랑, 동전 지갑 (22분 50초)
병아리, 노랑, 동전 지갑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포함하여 22분 50초 동안 써낸 단편 소설입니다.
“학교 앞에 병아리 팔던 거, 기억 안 나?”
병아리? 당연히 기억난다. 하교 후에 인서에게 병아리 구경하러 가자고 했던 것도, 다음날 미술 준비물 살 돈으로 병아리를 사줬던 것도, 그래서 엄마한테 포켓몬 동전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거짓말 쳤던 것도 모두 다. 현주는 기억이 안 나는 척 적절한 대답을 찾고 있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아 왼쪽 눈썹을 긁어댔다. 손을 대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이마에 땀이 제법 흐르고 있었다. 여름 끝자락이라 해가 지면 쌀쌀해서 걸치고 온 바람막이가 화근이었다.
“야 정현주, 진짜 기억 안 나?”
앞서 걷던 인서가 뒤돌아서 현주를 쳐다봤다. 급기야 뒤로 걸으며 현주의 반응을 살폈다.
“뭐… 그게 언제 적인데. 그런 게 있었나?”
인서는 현주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는지 다시 앞을 보며 걸었다. 현주는 그런 인서의 뒷모습을 찬찬히 살피며 조용히 뒤따라갔다. 오랜만에 보는 이 뒷모습이 익숙하지만 너무 낯설었다. 둘은 무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성적 차이 때문에 인서만 서울로 대학을 갔다. 그전까진 항상 붙어 다니던 탓에 서로 연인이 생기질 않았다. 생겨도 현주의 남자친구는 항상 인서를 질투했고, 인서의 여자친구는 현주를 질투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니 자연스레 서로 연애를 안 하게 됐다. 둘은 애석하게도 서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서로보다 잘 맞는 사람은 없었다. 동성 친구들보다 편했고,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었다. 인서가 서울로 가기 전까지는.
먼저 정적을 깬 건 현주였다.
“부모님들 지난주에 등산 갔을 때 들었다던데.”
“뭘?”
“…. 너 결혼하는 거.”
“아…”
“아? 내가 그걸 엄마 아빠 통해서 들어야겠냐.”
“오늘 말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하여튼 우리 아빠 성격도 급하다. 니 귀에 들어갈 거 뻔히 알면서.”
“축하해.”
“고마워.”
또다시 정적이다. 옛날에도 이랬었나, 현주는 생각했다. 매일, 매시간 함께 했던 친구. 옆에 없으면 불안했던 내 친구. 그때는 말이 없어도 불편한 느낌은 없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불편했다. 언제 이렇게 우리 사이가 변했을까 묻고 싶었지만 현주는 이제 모든 관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또 고민하던 차에 인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현주는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인서를 만나러 오기 전에 구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기를, 신이 이번만은 내 편을 들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불안한 예상은 늘 똑 맞아떨어졌다. 연노랑색 배경에 적힌 박인서&임민정 결혼합니다. 이미 청첩장 앞면의 모든 글자를 훑은 현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민정이구나, 그분 이름이.
“내 첫사랑, 너였던 거.. 알지?”
청첩장을 내려다보던 현주가 고개를 들어 인서의 눈을 바라봤다. 얘는 거짓말을 칠 때 눈을 자주 깜빡인다. 인서의 눈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가끔씩 감겼다. 현주는 가장 그리웠던 이 눈빛에 갑자기 가슴이 저렸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청첩장을 낚아채며 재빨리 뒤돌아 섰다.
“넌 무슨 그런 농담을 청첩장 주면서 하냐? 나 배고파. 고기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