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우리집의 위치를 잠깐 소개하면, 우리집은 제주 최북단, 제주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공항에서 차로 15분 내외여서 간혹 육지로 나갈 때에는 내 평생 제일 단시간에 공항에 도착하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살던 곳에서 공항에 가려면 공항 버스를 탔을 경우 김포 공항은 1시간 30분, 인천 공항은 당연히 그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 공항에 가는 것만으로도 지치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주 최북단에 살다보니 당연히 지리적으로 우리집에서 가장 먼 곳은 표선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남원읍, 여름 태풍이 가장 먼저 들이닥쳐 그맘때면 각종 방송사 기자들이 비바람 속에서 우비를 입고 위태롭게 서 있는 법환포구가 있는 법환동 같은 최남단이었다. 그래서 사실 성산일출봉부터 법환동에 이르는 동남쪽의 카페들은 그다지 갈 일이 없는데 내가 누구인가. 디저트, 특히 치즈케이크를 격하게 아끼는 빵순이 아닌가. 그런 내가 실력 있는 젊은 사장님이 개성있게 만든다는 치즈케이크 소문을 들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래서 드라이브 하기 좋았던 어느 날, 남편을 살살살 설득해 멀고 먼 남원읍으로 출발했다. 1시간 이상은 잡고 가야 하는 길이지만 바람도 좋고, 햇빛도 좋고, 노래 선곡도 좋고 이래저래 모든게 다 좋기만 했다. 이건 아마도 치즈케이크의 효과가 아니었을까.
참고로 내 케이크 취향은 '못 먹는 건 없지만, 좋아하는 건 있다.'로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이 세상의 모든 케이크와 티푸드 중 딱히 "이건 싫어요!"하는 건 없지만 그 중 고르라면 부동의 1위는 꾸덕꾸덕한 치즈케이크(그래서 폭신폭신한 뉴욕 치즈케이크는 제외), 2위는 얼그레이 케이크, 3위는 딸기 타르트이다. 사실 최근에는 비건 빵에 빠져 비건 베이킹을 배우고 직접 어설프나마 만들기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건 케이크도 탑 5안에는 든다(다만, 몇 번 안 되기는 하지만 내 경험상 비건 케이크는 만드는 분의 실력과 철학에 따라 맛과 식감의 차이가 큰 편이라 입에 잘 맞는 곳에서만 주문해 즐기고 있다.).
아무튼 긴긴 시간을 달려 작은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제주살이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 작은 마을 안쪽에 보석같은 집들이 숨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우리는 당황하지 않고 네이게이션의 안내대로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는데, 그곳을 바라본 딸의 첫 마디는,
"아! 귤 창고다."
정말 그랬다. '감성' 좀 있다 싶은 카페들이 통유리창이나 폴딩도어로 전면의 개방감을 뽐내는게 요즘 트렌드이던데 이것은 돌벽으로 꽉꽉 막힌 귤 창고였다. 그것도 세월의 흔적을 잔뜩 안고 있는.
그래서 더더욱 심상치 않은 고수의 향기가 났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서울촌닭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여기저기 흔하게 보이는, '나 멋있지?' 라고 대놓고 묻는 것만 같은-서울에도 흔히 있는 스타일의- 통유리창 카페보다 오래된 귤 창고의 외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제주 제주' 하는 그 감성에 마음이 풍덩 빠져 버린 것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건 또 무슨 일? 반전 매력 넘치는 클래식한 멋이 넘치지 않는가. 내부는 아늑했는데, 귤 창고를 리모델링한 곳이다보니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스러움과 아늑함, 투박함 등이 어우러져 고즈넉하고 따스한 분위기이다. 귤 창고 특성상 소리가 울리다보니 카페 곳곳에 조용조용히 얘기해달라는 사장님의 부탁 메모가 눈에 띄는데 이것 또한 개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케이크는 여러 종류이다. 쇼케이스로 가보면 두부 한 모처럼 생긴 개성있는 디자인의 케이크(두부케이크 아님 주의)부터 제주 말차와 청보리 가루, 제주 단호박 등을 담은 '제주스러운' 케이크들이 다소곳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두부 한 모 아님 주의!
'1인 1케이크'가 家룰이므로 세 가지 맛의 케이크와 음료를 주문하였고 빠르게 테이블에 올라왔다. 딸과 나는 정말 포크를 대기가 미안할만큼 하얗고 네모 반듯한 케이크를 천천히 음미했는데, 이런 이런! 이렇게 담백한 단맛이라니! 다른 이들보다 단맛을 조금 더 예민하게 느끼는 내 혀에도 적당히 기분 좋은 당도와 순수한 재료의 콜라보는 포크를 기다리며 대기 중인 두 번째, 세 번째 주자들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주었고 치즈케이크는 그 기대감을 채우다 못해 흘러 넘쳤다(결국 치즈케이크는 재주문했다. 케이크 4개를 순삭하는 나와 딸의 모습에 워낙 익숙한 남편은 놀라지도 않더라. 오히려 "더 주문할래?"라고 묻는 센스까지 장착! (남편도 제주 감성에 물들어가는 중이었던 것일까?)
이 카페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면,
며칠 뒤, 퇴근한 남편이 슬쩍 웃으며 "회사에서 제주 토박이인 직원분께 감귤 창고를 개조한 카페에 갔다고 했더니 그 분은 집에서 감귤 농사를 해서 창고에서 고생했던 기억밖에 없는데 거기를 왜 육지 사람들은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던데."라고 말했다.
아, 나에게는 그저 멋진 곳이었는데, 누군가에는 고단한 일터였다니.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경험과 환경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른 느낌으로, 다른 방향으로 보이고 인식될 수 있다는 세상의 이치를 새삼 깨달으며, 내 관점만 중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철학적인 생각이 순간적으로 짧게나마 지나갔다. 또 한편으로는 일하는 공간으로만 인식되었던 감귤 창고가 이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감귤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무튼 그 곳은 제주살이 초년생인 나에게 이곳은 제주의 매력과 감성을 듬뿍 느끼게 하는 개성 넘치는 공간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용함'을 지향하는 카페이므로, 이곳을 방문한다면 대화 타임은 살짝 뒤로 미루고 고즈넉한 분위기와 맛있는 디저트의 조합을 만끽하실 것을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