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도 교훈이나 급훈 같은 것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가장 많이 등장히는 것이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근면, 성실이 아닐까. 그것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핵심 가치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범국가적으로 근면 성실의 기치를 내건 환경에서 자라고 살아와서 몸에 밴 것일까.
아무튼 우리는 지구상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성실 근면의 민족이다. 나또한 몸 컨디션이 안좋은 상황이면 내면에 여러 소리가 서로 싸운다. 오늘 일하러 가지 못한다고 전화한통(call in sick) 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지난 2월부터 일하고 있는 지금 직장에서 딱 3일 아파서 쉬어봤다. 그중 이틀은 일하러 갔는데 열이 나고 몸이 안좋아 집에 돌아간 경우였고 하루는 미리 못간다고 한 경우였는데 단 하루였는데도 그들은 야박하게 의사의 소견을 요구했다.
오만 정나미 떨어지는 경험을 한 이후 나는 일하러 갈 때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아우 피곤해. 단 하루의 콜인에도 닥터스 노트 내라 하는 사람들이니까 치사해서 내가 몸 안좋아도 걍 나간다. 꾸역꾸역 나가주마 어우 치사한 인간들.'
그러면 딸내미는 꾸역꾸역이라니 스스로를 넘 비참하게 만드는 거 아니냐며 질색을 한다.
널싱 홈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출근할 때면 나는 가끔 야구장의 마운드에 '등판'하는 투수를 떠올리곤 했다. 온갖 개인사정을 뒤로 하고 일단 등판을 했으면 정신을 집중해서 주어진 시간동안 일어나는 일들에 마음을 두고 적절한 판단하에 최선의 조치를 하고 처리한후 이 모두를 책임져야 하는 점에서 그랬다. 비슷한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가짐이 그랬다는 말이다.
어제 밤 근무를 하는 중간의 즐거움은 단연 브레이크 시간이렷다. 커피 한잔을 들고 나만의 장소를 찾아 의자 두 개를 맞 붙여놓은 다음 느슨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죽 펴고 앉았다. 오는 길에 직원 파일함에 들러 가져온 통지물같은 봉투들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We appreciate you'라고 적혀진 편지가 있었는데 시간당 2달러를 급여외로 한시적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왜? 내가 어쨌길래? 하는 생각과 함께 간사하게도 꾸역꾸역 일하러 나오면서 그들의 야박함에 이를 갈며 흉본 것에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참 별일이다 하면서 요즘 읽고있는 책, '마음의 지혜'(김경일 지음)를 폈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조금 읽어내려가다가 나는 또 깜짝 놀랐다.
프로야구 감독님들께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수를 에이스라고 생각하세요?" 대체로 오는 대답은 비슷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컨디션이 좋든 나쁘든, 자기 순서가 되면 꾸역꾸역 등판하여 한결같은 공을 던져주고 가는 선수. 그들을 최고의 선수로 꼽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꾸역꾸역. 언제부터인가 저에게 이 말은 존경과 감사를 담은 표현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예쁘든 아프든 모자라든 부모는 꾸역꾸역 사랑을 주고, 선생님은 꾸역꾸역 바른 길을 가르칩니다. 가게 사장님들은 꾸역꾸역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버스 기사님은 꾸역꾸역 제시간에 도착하며, 군인은 꾸역꾸역 훈련장에 가고, 지휘자는 꾸역꾸역 지휘봉을 잡습니다. 우리의 순조로운 일상이 매일 누군가가 꾸역꾸역 해내는 일 덕분에 이루어진다는건 경이롭습니다.
얼핏 자기비하같게도 들리고 사는 일의 구차함과 비루함마저 풍기는 것만 같았던 '꾸역꾸역'이 갑자기 사람사는 냄새를 풍기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격상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꾸역꾸역 '등판'하여 한 쉬프트를 지키고 꾸역꾸역 세상 편한 내 보금자리로 돌아와 꾸역꾸역 브런치에 내 글을 쓴다. 꾸역꾸역 사는 일에 대하여 가치를 새롭게 한 나는 모름지기 사상이 건전한 생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