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가 떠난 뒤 잠시 동안은 허전함에 일상이 달라진 듯했지만 그마저 익숙해지면서 나의 시드니 살이 또한 예전과 비슷해졌다. 그래도 달라진 점은 S가 남긴 빈자리를 샘이 채우면서 우정보다는 연애에 시간을 더 투자했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같이 일했기 때문에 오며 가며 어울리기도 하고 틈이 나면 같이 바람도 쐬러 가면서 평범하고 즐겁다면 즐거운 날을 보냈다.
그런데 워홀러라면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이 계속될 때 드는 생각이 있다. 그건 바로 세컨드 비자, 즉 워홀 비자 연장이다.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2회까지 연장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워홀을 할 때는 1회, 최대 1년까지 연장이 가능했고 신청 요건은 지정된 지역에서 90일 이상 농장이나 고기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지정된 지역은 우편번호를 이용해 범위가 정해지는데, 사실 간단히 말하면 호주 깡촌이다. 즉, 저 멀리 회색 캥거루 무리가 뛰어다니고 전화 통화는 핸드폰을 하늘로 치켜들고 터지는 곳을 찾아 헤매야 겨우 간단한 통화라도 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사실 나는 애초에 농장이나 공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6개월에서 최대 1년 간 생떼 같이 돈을 모아 얼른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온 호주였다. 그런데 워홀 생활이 나의 기대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니 1년으로는 무슨 목표를 세우던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거기다가 주변에서 자꾸 믿음직스러운 '바람'을 넣는 인물이 나타나버려서 아마 다시는 겪지 못할, 어쩌면 없길 바라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인물은 바로 새롭게 셰어 하우스에 입주한 H 언니였는데, 말을 트고 나니 친언니와 동갑이고 동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금세 친해졌다. 거기다 언니는 큰 키만큼 성격도 호탕하고 너그러워 같이 있으면 즐겁고 편해서 내가 잘 따랐다.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인성을 가진 언니가 말해주는 농장 계획은 얼마나 근사 했겠는가. 거기다 아예 맨 땅에 헤딩도 아니고 H 언니가 아는 언니가 아는 사람이 이미 일하고 있는 고기 공장에 지원서만 쓰고 바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시드니에 도착하고 일자리 때문에 겪은 설움을 생각하니 호박이 넝쿨 채 들어오는데 두 번 고민했다가는 큰일 날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믿음을 가지고 나도 H 언니의 90일 여정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고 H 언니는 방금 언급한 아는 언니인 K 언니와 상의 끝에, 고기 공장 삼총사를 결성했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고기 공장이 있는 탬워스로 떠나는 날이 됐다. 우리 3 총사는 기차를 타고 탬워스로 가기로 해 아침 일찍 나를 배웅하기로 한 샘과 함께 센트럴 역으로 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샘이 못내 아쉬웠는지 자꾸 본인이 처음 호주 올 때 어머니가 비상금으로 쓰라고 주신 백금 반지를 주려고 했다. 정말 고마웠지만 어머니가 샘에게 반지를 주실 때 만난 지 몇 주 밖에 안된 웬 여자애한테나 주라고 주신 것도 아닐 텐데 그걸 날름 받는 게 염치가 없어 보여 절대 싫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치 손에 웜홀이 있는 듯 환장할 정도로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내가 그걸 간수할 자신이 아예 없어 더욱더 강하게 거부했다.
그렇게 서로 옥신각신 하다 보니 어느새 기차 시간이 다 되어 우리는 플랫폼에서 작별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기회만 살피던 이 망할 놈의 로맨티시스트의 계략에 의해 나는 백금 반지를 손에 쥐고 기차를 탔다. 하지만 빠르게 플랫폼에서 달아나는 기차를 따라잡으러 달리는 샘의 해맑은 얼굴에 먹칠, 아니 그 웃는 낯을 그냥 먹통에 처박아 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탬워스에 도착하자마자 반지를 기차 안에서 놓쳐 잃어버렸다.
망할 로맨티시스트! 망할 웜홀! 시발 것의 손! 지금도 그때 받은 충격이 정말 생생하다. 너무 충격이 크다 보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고 목구멍에서 위까지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 나면서 극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정말 너무 미안해서 그 이후로 오랫동안 반지를 잃어버린 사실을 함구했다. 정말 지질하고 유치한 처사이지만 도저히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물론 몇 년이 지나고 샘이 은근히, 혹시 잃어버렸냐고 물어서 석고대죄를 하긴 했지만 그때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뒷목이 쭈뼛 선다.
일평생 살면서 샐 수 없이 많은 물건을 잃어버렸다. 우산, 지갑 여러 개, 핸드폰 진짜 여러 개, 방금 산 새 옷, 도시락, USB는 물론 백업용 하드 드라이브 (클라우드 기술에 감사를 표한다), 집 키 등. 심지어 엄마가 두부 사 오라고 준 오백 원을 손에 쥐고 있다가 슈퍼에서 잃어버린 적도 있다. 마치 귀신이 장난치듯 분명히 손에 돈이 있는 걸 확인하고 계산대에 갔는데 감쪽같이 돈이 사라져 있어서 다시 맨 손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가 허탈하게 웃는 엄마를 면목 없이 마주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잃어버린 모든 물건을 다 되돌려 받아도 저때 잃어버린 백금 반지 하나 돌려받는 것에 비할 수 있을까? 잃어버림에도 급이 있다면 아무래도 이 백금 반지 사건은 역대급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