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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Dec 07. 2020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도박

탬워스에 도착하고 나서 가장 처음 느낀 것은 나를 잠식하는 엄청난 노곤함이었다. 물론 앞서 일어난 반지 사건 때문에 눈물, 콧물 다 짠 것의 영향이 컸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기차를 타고 대여섯 시간을 여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아 푸석해진 얼굴로 탬워스 YHA 백팩커에 체크인을 하고 나는 언니들과 예약한 4인실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가 K언니의 지인,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자리라는 크나큰 영광을 선사하실 분과 같이 할 저녁 식사에 맞춰 잠에서 깼다.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그 지인은 같은 고기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 2명, 그리고 대만인 커플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셋은 뒷마당에 조촐하게 마련된 환영 파티를 서두로 이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여독을 풀었는데, 다른 언니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이것이 바로 장밋빛 공장 생활의 시작이구나, 하면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던 것 같다.


그렇게 즐거운 환담이 이어지면서 저녁은 무르익을 때로 익었다. 그 쯤되자 어느 정도 이제 안면도 텄겠다, 우리 삼총사의 제일 맏언니인 K언니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엿보다 환영 파티의 하이라이트를 찍었다.


"그래서 우리 언제부터 일하면 돼?"


잘 만들어진 밥상에 숟가락만 탁, 얹으면 되는 그 순간, K 언니의 지인은 밥상을 힘차게 엎어버렸다.


"아 그거! 지금 일자리 없대."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H 언니나 나나 멍청할 정도로 K언니 말만 믿고 온 터라 사전 조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캐리어만 달랑 들고 탬워스로 온 마당에. 이어서 그 지인은 어느 정도 당혹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일단 탬워스 구직 센터에서 해당 고기 공장에 구직 신청을 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얘기를 해줄 테니 좀 기다려보라고 했다. 하지만 한 번에 세 명이 한 번에 일을 구하기는 좀 힘들 거라는 황송한 예언도 잊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당연히 환영 파티는 내리막길을 걸어 처음에 고조된 분위기와 비교하면 다소 우울한 분위기로 파했다. 그리고 곧 그 집을 나선 우리 셋은 단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바빠지기 전에 신나게 놀자 다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밟았던 길을 터덜터덜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탬워스에서 묵었던 YHA 4인실 내 침대


그 다음날 아침, 우리 셋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일단 한 주에서 이 주까지 고기 공장에서 연락이 오길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아직 그 전날 파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지만 정말 다행히 언니들 모두 불평불만보다는 격려와 배려가 더욱 몸에 밴 사람들이어서 그래도 나름 희망찬 아침을 맞이 할 수 있었다. 다만 슬프게도 우리는 그 뒤 탬워스에서 무려 한 달을 꼬박 대기만 타다 끝내는 삼총사에서 이총사로 갈라져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K 언니 지인이 우리를 낙하산으로 꽂아 주기로 한 고기 공장에 이력서를 넣기 위해 길을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탬워스 구직 센터였는데,  탬워스 정도 내륙 깊이 들어와 있는 시골 도시에는 정부 또는 시에서 운영, 또는 지원하는 무료 구직 센터가 있어서 대부분 공장이나 농장 일은 여기서 구할 수 있다. 그런데 어찌나 탬워스가 작은지 시내 바로 끝에 위치한 구직 센터도 단 몇 블록 걸어가니 도착했고 그 와중에 시내에 있는 몇몇 가게, 도서관, 공공 기관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거기다 딱 이틀 전에만 해도 늦은 시간까지 붐비는 월드 스퀘어 맞은 편에 살던 나에게는 낮 2시도 안된 시간에 거리 내 모든 카페 문이 닫혀있는 모습이 굉장히 신선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탬워스에서 구직에 실패한다. 그것도 한 달 동안 대기만 타다가 말이다. 물론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원인에는 K 언니 지인의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는 금 같은 조언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우리 삼총사가 같이 가야 한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의리가 더 큰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다행인 건 헤어질 때 서로 건투를 빌며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는 점이다.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K 언니는 혼자 다시 아는 사람을 통해 다른 도시로 떠났고 나와 H 언니는 함께 다른 큰 시골 도시 중 하나인 그리피스로 떠났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연락을 이어가면서 잘 지냈고.


탬워스에서 경험 이후로, 그리고 전반적인 워홀 경험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박인지 깨달았다. 나야 운 좋게 심성이 고운 사람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몸은 고생을 했을지 언정마음에 큰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일이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무턱대고 누군가를 믿어버리는 태도는 사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손 안대고 코를 풀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입 주변에 콧물 범벅을 한다. 그만큼 나의 노력 없이 뭔가를 얻는다는 것은 역시 환상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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