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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공리셋 Sep 27. 2020

저희 독립하겠습니다

이사, 작은 반란의 시작

결혼해서 시댁과 5분 거리.

2년 뒤에 결혼한 동서도 시댁과 5분 거리.

한마디로 세 가가족은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님의 작은 공장에 두 아들이 일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세 가족이 붙어사는 거의 열 식구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크게 문제없이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시부모님도 두 며느리, 아들들도 각자가 분명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 보이는 노력을 해 왔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제외하고 여섯 사람은 모두가 다른 사람들인지라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며느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큼 정말 피붙이가 아니라서, 서로가 분명 노력하고 살아야 할 인연으로 만들어진 가족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야 할 상황들이 분명 있었고, 그런 것들이 쌓고 쌓일 때마다 나 같은 경우 일기장에 미친 듯이 풀며 내 감정을 내려놓고는 했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꼭 혼자 풀어내는 시간이 필요했었다.

미운 정도 고운 정도 함께 드는 게 가족이라 크게 문제 삼을만하면 그렇게 풀어내지만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케케묵게 그냥 쌓아둔 감정도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보육의 시기를 지나 교육을 해야 할 시기가 되고 보니 나에게는 눈에 띄 부모님은 눈치체지 못하시는듯한 세대갈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먹거리, 잠자는 시간 등등 생활습관이 삐뚤어지는 게 보이니 온전히 내 힘만으로는 안된다고 느껴지니

가까이 살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참아오던게 아이들의 습관이 되어버리고, 이제는 진짜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나' 그리고 '아내로서의 나'의 역할에 중심을 잡을 때가 왔구나! 라며 다른 마음을 굳게먹 되었다.

어쩌면 당연히 태어날 때부터 "내가 엄마예요!"라고 강하게 어필하며 아이들을 책임지고 키웠어야 할 나였지만, 나 또한 준비되지 않았던 미숙한 엄마일 뿐이었고 어른들의 간섭이나 말씀에 크게 반발할 성격도 못됐고,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받아들이고 넘어가고 했었는데, 나도 아이도 그 와중에 함께 컸고 '이제는 아니야!'를 스스로에게 외쳤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육아휴직을 결정하게 되었고, 듣기 좋은 핑계를 덧대어 신랑의 직장 옆으로!

한디로 시댁과 5분 거리에서 20분 거리로 이사를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많이 섭섭하신듯한 눈치셨지만 말리지는 않으셨다.

알아서 해석하셨겠지만, 오래전부터 눈치는 채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이사를 강행하고 네식 구만 온전히 주변에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동네로 거처를 정해 이동해서 살아보니...

뭔가 허전하면서도 온전히 우리 네 가족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희한하고 참 좋았다.

본래 네 명이 맞았는데 표현할 수 없는 애매한 진짜 네 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힘든데 설레고, 힘든데 더 애틋해지고 무슨 기분인지 그냥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감정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짐과 동시에 가까이 사시던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께 의지하며 살던 소소한 반찬거리나 아이들 긴급 보육에 있어서도 빈틈을 혼자 메꾸려다 보니 내 생에 처음으로 방광염도 걸려봤다.

면역력이 심하게 떨어지면 오는 질병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 지금 내가 꽤나 힘든가 보구나'생각했지만

내 몸만 그렇게 반응할 뿐 내 마음은 전혀 힘든 줄 모르고 있었다.

급 적응기 3개월이 지난 시점쯤부터는 살이 찌기 시작해 어느새 2kg이나 몸무게가 불어나 있었다.

'몸도 마음도 이제는 완전히 편해졌구나!' 생각되었다.


가까이 살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열식 구가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해야 하고, 평일날 퇴근시간쯤 또는 퇴근 후 양말 벗어던지며 아이들과 살부비려할 때 갑자기 외식하자는 시아버님의 걸려오는 전화는 나에게 불안정했던, 정신줄 놓고 살 수밖에 없었던 일상이었던지라 그 모든 환경이 차단된 지금은 분명히 변수가 없는 안정적인 삶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는 챙길 것도 많아서 부스터며 젖병이며 이유식이며...

챙겨서 저녁 먹으러 가는 게, 짜증도 났지만 미련 곰탱이처럼 거절 못하는 성격에 힘들어도 잘 참는 나만의 강점을 이럴 때 쓸데없이 꺼내어 그렇게 잘도 쫓아다녔다.

맛난 거 먹을 수 있고, 어른들이 아이들을 이뻐하시고 보고 싶어 하시는 그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군말 없이 노력했던 것도 같다.

부족하지 않게 신경 써서 나눠주시는 퍼주시는 시부모님의 정에 본래도 거절을 잘 못하는데 더욱 "싫어요"라고 당당히 말하기가 많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끔 주변에서 콕찦어서 " 안 귀찮아?"라고 물으며 정신 차리고 '나 왜 이러고 살지?...'생각했다가도 지나면 까먹는 게 사람인지라...

그렇게 그냥 힘든 줄 모르게 잘 지내온 듯하다.


20분의 물리적 거리로서 몸과 마음이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편안함이 물밀듯 밀려오는 걸 느끼면서 비로소 '나 여태 많이 힘들었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동서가 연락 왔다.

"형님, 저희도 형님 옆으로 이사 갈려고요"

.

.

.

"... 응..."


우리가 이사한 곳이 아이들 키우기 좋다는 공원도 잘 조성되고 놀거리 먹거리 갖춰지기 시작한 신도시였다.

싱싱 카를 마음껏 탈 수 있고, 놀이시설도 가득했던 그런 곳이었기에 당연히 올 만도 하지...

동서네 아이들도 우리 아이들과 똑같이 동갑내기였기에 좀 더 나은 곳으로 이사하고 싶었으리라...


무엇보다... "너도 나만큼 힘들었지?"만구 내 개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후폭풍이 좀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시어머님이 우울하시다느니 뭐 자잘한 이야기가 들렸지만, 우리가 해결해줄 수 없는 감정 문제이기에, 내 감정도 소중하기에 애써 차단하려 애썼다.

이사 후 내던지시는 말들이 두 아들은 모르겠고, 동서나 나의 귀에만 예민하게 들렸을지언정 그냥 흘리려 애썼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내 몸과 마음이 이래 좋다고 외치는 걸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평일날 잠시 잠깐 보는 시간도 없어졌고 평일에도 가끔 만나 동거 동락하던 때는 없어지고 주말만 보게 되고, 주말도 누군가에게 일이 생기면 못 보고 넘기게 되기도 하고...

'이 시간들이 자식들만 바라보며 사셨던 시어머님께 많이 외롭고 힘드셨으리라...'

언젠가는 극복하셔야 할 어머님의 몫이라고 단정 짓고 조용히 묻어둔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으며...


적정한 거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함께 오래 할 수 있다는 걸 몰랐기에 시부모님도 모르시기에 결혼 후 10년이 지난 시점 이제와서야 힘든 시간의 시작이 경고된 거 일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모두가 건강하게 오랜 시간 함께 해야 할 가족이기에... 조금씩 불편한 감정을 극복해나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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