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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15. 2020

Ep20. 같은 바다, 다른 세상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오늘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나 이불을 툭툭 쳐 반듯하게 만들어놓은 뒤 부엌으로 올라갔다. 이젠 잠결에도 만들 것 같은 프렌치토스트가 곧 만들어질 예정이다.



‘탁탁’


계란 두어 개를 적당히 넓은 접시에 깨 넣어둔다. 그리곤 우유를 손 가는 대로 붓곤 부드러운 계란 옷이 될 만큼 휘저어준다. 버터 한 조각을 큼지막이 잘라 팬 위에 올린 뒤,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한 여름에 어울리지 않은 두툼한 계란 옷을 껴입은 빵 녀석들을 옹기종기 모아놓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잊어선 안될 것. 커피 물을 데워야 한다.



평소와 조금 다른게 있다면 아메리카노가 아닌 라떼가 요즘 취향이라는 거다. 우유에 설탕을 녹이고 얼음을 동동 띄워, 그 위에 진한 샷 한 잔을 올려놓으면 완성이다. 오늘은 생각보다 우유를 많이 따른 탓에 식전 우유 한 잔을 하게 되었다.



아니 이게 웬걸, 순간 내 혀의 감각을 의심했다. 그리곤 우유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보았다. 분명 우유인데 요거트 맛이 난다. 자연 숙성일까... 상한 우유맛이 이리도 좋을 수가 있단 말인가? 순간 고민했다. 마시는 요거트가 되어버린 흰 우유를 버려야 할까, 아님 그냥 마실까.


우유가 요거트가 되어버린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뭐 결국 이성을 찾아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미 구워진 식빵은 모른체하곤 그냥 먹기로 했다. 맛만 좋구만, 걸쭉해진 우유 덕분에 느낌상 프렌치토스트가 더 잘 된 것 같았다. 근데… 아마 며칠 전부터 상한 것 같은데, 그래서 아침마다 화장실을 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닝 x이 생활습관이 된 것 같아 좋아했는데, 아마도 요구르트 이 녀석 때문이었나 보다.


문제의 우유로 만든 토스트, 맛은 좋더라





‘부르로로롱’


오늘은 오도방구 소리가 어찌 시원찮다. 악셀을 세게 당기지 않은 까닭이다.



구름으로 온 세상이 가려진 오늘 난 선셋을 보러 간다. 그것도 1시간이나 전에. 일상을 조금씩 곱씹어 보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고, 생각해보면 급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이나 내린 비 덕분에 축 늘어진 몸뚱어리와 시름시름 앓고 있는 마음이란 놈들을 데리고 드라이브에 나섰다. 집 구석에 박혀있기보단 바람이라도 쐬어야 말이라도 들어줄 것 같아서 말이야.



항상 시간에 뒤쫓겨 떨어져가는 태양을 붙잡았던 어제완 달리, 오늘은 천천히 달리며 내 뒤의 친구들을 먼저 보낸다. 가끔은 빵빵거리고 오토바이를 타곤 흘겨보기도 하지만 난 선글라스와 헬멧을 장착했기 때문에 눈치 따윈 보이지 않는다. 먼저 가 친구들



좁은 공간에서 해산물부터 육류, 길거리 음식까지 재미가 가득했다.


아차, 가는 길에 맥주 한 병을 사 가려 했는데 알코올 금지령이 내려졌단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꿩 대신 닭이라고 지나가던 시장에 들러 타이 밀크티를 한 잔 시켰다. 그리곤 한 바퀴 시장을 둘러보는데 글씨만 다를 뿐 엄마 손 붙잡고 다녔던 시장과 다를 게 없었다. 그땐 나의 주 관심거리는 호떡이나 기름에서 갓 튀겨낸 크로켓 그런 거였는데, 이젠 오늘 저녁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느끼고 있다.



내 사랑 타이 밀크티. 버블이 필수다.





어느덧 달려 도착한 Bang Makham 해변, 두어 번 왔던 곳이라 이전 동네 아저씨들과 자연스레 인사를 나눈다. 야자수 사이로 보이는 하늘색의 향연, 잠시 오토바이를 멈추곤 멍하니 바라본다.




‘외국에 왔구나'


외국에 온 지 한 달이 넘어가면서 뜬금없이 가끔 이렇게 느끼곤 한다.



야자수 사이로 몸을 감춘 바다 위로는 구름이 가득했다. 이 세상을 다 가진 듯이 말이다. 그냥 흐린 게 아니라, 구름마다 자신만의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누구는 기다랗게, 누군 회오리처럼 하늘 위로 치솟아 있었다. 마치 태풍이 오기 전과 같은 폭풍전야 말이다.



물질하는 동네 주민들


그런 바다 아래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낚시를 하거나 물 아래로 들어가 물질을 하곤 했다. 차마 방해가 될까 주변을 서성이며 한동안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부른 듯 아이는 가방을 메곤 낚싯대와 잡아온 물고기를 나르고 있었고, 곧장 해변가에 조개를 캐고 있는 어머니 옆으로 가 다시 조개를 캐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삶의 터전이자 그들만의 세상이겠지. 그걸 아름답게 바라보는 나의 세상도 있고 말이야.



걸을 땐 몰랐지만 바다를 지긋이 바라보니 수많은 움직임이 파도 밑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나씩 등 껍데기를 가지고 빼꼼히 머리만 내미는 게와 고둥, 언뜻 보면 돌멩이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나름의 세상을 펼쳐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의 발 한 걸음이 그들에겐 하루 종일이겠지만 말이야.



모두 돌멩이 같지만 각기 다른 생김새를 가진 생명체들이다.


어둠을 이기지 못하고 동네 주민들은 다들 각자의 할당량을 채운 뒤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고요해진 바다, 아니 그 속엔 수많은 움직임이 새로 시작된다.



오늘 하루를 위해 열심히 물고기를 낚는 동네 주민들, 축 늘어진 몸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바다에 나온 청년, 그 아래에서 아등바등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는 바다 생명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바다 한 장면엔 여러 가지의 세상이 존재했다.
아니, 내가 보지 못한 수많은 세상이 존재했다.  





비록 새빨간 해질녘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위안을 얻은 나는 돌아와 힐링 굳히기를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잠드는 것.



‘어바웃타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는 일, 세상 행복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각자의 인생 영화가 있듯 나에겐 어바웃 타임이 그런 존재였다. 어바웃 타임이 인생 영화가 되기까지 많은 배경들이 숨어있었다. 고등학생 2학년 거의 여자와 처음으로 단둘이 본 영화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느껴본 연애라는 설렘과 이어지는 영화의 아름다움. 그 어린 학생이 결혼하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아직도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다. 두 주인공이 암실 데이트를 하고 나와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 결혼식장에서 문이 열리며 빨간색 드레스의 여주인공이 나오는 장면, 남자 주인공이 갑작스레 방에서 조용히 프러포즈하는 장면. 알면서도 다시 장면을 마주할 적엔 마치 내가 주인공이라도 된 양 어쩔 줄 몰라 한다.



암실 데이트에서 나와 처음 마주한 서로.


왠지 모르게 미소 지어지는 장면이다.
치명적인 눈웃음과 빨간 드레스


몇 년이 지나도 항상 넘치는 설렘을 가져다주는 이 영화는 내 마음속의 1번지이다.





영화에서 가장 마음 깊숙이 넣어두었던 장면이다.


하루를 두 번 살아볼 것. 처음엔 그저 그런 대로, 두 번째엔 순간순간의 여유와 즐거움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것. 그리곤 하루가 특별한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 매일이 같은 지루한 일상인 것처럼 느끼지만 그 속에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른 감정들, 그것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영화처럼 나에게 하루를 다시 살아볼 기회는 없으니깐.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바버가 되었다.


갑분 바버.


며칠 전 바버 숍이 모두 닫았다며 나에게 바버가 되어주길 요청했다. 영화를 보던 와중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마크의 긴급전화였다. 제스퍼가 머리를 잘라주고 있었는데 도와달란다. 안 봐도 뻔히 그림이 그려졌다. 생각보다 어느 정도 잘라둔 제스퍼 덕에 옆 뒤 글 바버가 된 마냥 깔끔하게 밀어주곤 가르마 스크래치까지 넣어주었다. 사실 스크래치는 처음이라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잘 되었다. 나 소질이 있나 봐...


사실 이발병 6개월 경력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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