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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티혀니 May 16. 2020

Ep22. 물들 수 있다면, 나는 빨간색을 고를테야

[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Ep22. 한 가지 색으로 물들 수 있다면, 나는 빨간색을 고를 테야


일찍 잠들면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상상을 하게 된다. 마치 오늘 잃은 시간을 내일 아침에 챙길 심산으로 말이다. 어제 삼각대를 찾지 못한 덕에 집에 오자마자 8시에 쓰러져 잠들었다. 그러곤 정신 차려보니 아직도 껌껌하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구나 싶었지만 핸드폰 시계를 보니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본능적으로 직감이 왔다. 잠에서 깨어날 것 같은 느낌. 



어떻게든 꿈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곤 오로지 잠에 집중했다. 이 공간 안에 들숨과 날숨만 들릴 정도로 말이다. 그러자 누군가 질투를 했는지,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웨에에에엥” 


하, 불청객이 또 한 번 찾아왔다. 이놈 자식들은 항상 내가 피곤할 때만 찾아오는지,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불을 켰다 껐다를 몇 번,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잘도 숨는 것 같다. 샅샅이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아도 흔적 하나를 살펴볼 수 없다. 이럴 땐 한 가지 좋은 방법이 있다. 피를 내주고 모기의 대가리를 치는 방법이다. 



양손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한 다음 목까지 이불을 덮어 모기들에게 나의 머리를 내어준다. 그렇게 1-2분 뒤 나의 숨소리를 들은 모기들은 분명 내 머리 위를 맴돌 것이다. “웨에에에엥” 귓가에 소리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곤 정적이 흐르더니 이마에 따끔한 느낌과 함께 나의 피를 앗아가기 시작했다. 



‘자식아, 함정이다’ 그 순간 재빠르게 손바닥을 펴 이마를 강타한다. 너무 세게 때린 탓에 이마가 아려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 손엔 만져지는 게 없다. 열이 뻗쳐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내가 모기의 함정에 빠져버린 것 같다. 



어느새 한 마리가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모기의 날갯짓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오늘은 헌혈을 하는 날이라고 다짐하곤 온몸 구석구석을 모기들에게 내어주었다. 물론 버물리를 머리맡에 두고 잔 턱에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바르곤 다시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아침 10시, 분명 어젯밤 8시에 잤는데 더 개운하지 않다. 밤새 몇 번이나 깼는지 버물리는 아예 뚜껑이 열려있다. 그 덕에 더 이상 가려움은 없었지만 빨갛게 부어오른 팔다리를 보니 분노가 치솟았다. 



‘정말 걸리기만 해봐, 너네 오장 육부를 하나하나 해부해 주겠어. 곤충이니까 머리가슴 배 나눠줄게’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 겨우 부엌에 도착했다. 아마도 몸에 기운이 없는걸 보면 헌혈을 너무 많이 했나 싶다. 프렌치토스트를 굽는데 설탕 뿌리는 걸 잊어버린 탓에 달달한 연유를 가득 뿌렸다. 커피 한 잔과 지친 정신을 달래주었지만 내 입맛까지 뽑아갔는지 도통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 못 먹었다는 건 아니다. 꾸역꾸역 커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씹어넘겼다. 이럴 때일수록 더 잘 먹고 힘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변의 아침, 프렌치토스트


다시 내려가 모기와의 전투를 선포했다. 실컷 피를 빨아먹고 잠시 휴식하는 틈을 타 일격을 가했다. 화장실에서 휴식 중인 한 마리, 콘센트 밑에 숨어있던 한 마리,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던 한 마리 총 세 마리를 저승으로 보내주었다. 어제 그놈인지 새로 온 놈들인지는 몰라도 괜스레 몸이 가벼워지는 걸 보니, 어젯밤의 화는 풀린 듯싶었다.






집 앞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걸 보니 오늘 태양이 단단히 화가 난듯했다. 적당히 사그라들 때쯤 옷을 벗어던지곤 풀장에 몸을 던졌다. 대낮의 열기 덕분에 풀장 또한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풀장에 얼굴만 댕그라니 올려놓은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늘이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한 번 미소 지은 뒤 다시 선베드에서 점점 모습을 감춰가는 태양을 반겨주었다. 



팔에 생긴 반팔 자국이 신경 쓰여 항상 아래로만 선크림을 바르고 태닝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바로 팔 토시를 끼는 것. “지니어스”



시간날때마다 풀장 옆 선배드에 누워 태닝을 한다.


그러곤 정말 맘 편히 누워 뜨거우면서도 은은한 열기를 즐길 수 있었다. 온몸이 새까매진 만큼 오늘을 잊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렇게 난 지워지지 않길 바라며 온몸에 여행의 자국을 깊게 새기는 중이다. 



그렇게 한 시간 뒤쯤, 날 달래주러 왔는지 황갈색 강아지가 쫄래쫄래 내 선배들 옆으로 찾아왔다. 말을 알아듣는 건지 온몸을 비비며 나의 뜨거운 손길을 실컷 즐기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머리가 난장판이다. 강아지만 봐주길 바란다.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여유스러움이 찾아왔다. 내 마음에도, 그리고 하늘에도 말이다. 정말 오랜만에 빠알간 하늘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 또한 같이 붉게 물드는 듯했다. 



왼편으로 조금씩 해가 져가고 있다.


구름은 좋겠다. 끝까지 태양의 뜨거움을 받아낼 수 있어서, 그리고 함께 물들 수 있어서 말이야.  하늘은 점점 빨간색에서 핑크 그리곤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10분도 채안되어 붉게 물들었다.


나도 물들 수 있다면, 그 색깔은 빨간색이었으면 좋겠어. 파란색의 하늘에 빨간색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렸더니 저렇게 여러 가지 색으로 변할 수 있잖아. 그 한 방울이 만들어낸 마법처럼 말이야.  



은은하게 그것도 조금씩 바뀌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내 눈동자부터 조금씩 빨갛게 물들어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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