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텝스 240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만난 외국인과 한달살기]
오늘은 날이 있는 날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 텅텅 빈 코사무이에서 약속이 있는 날이란 뜻이다. 항상 코사무이의 시크릿 장소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던 현지인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열기로 했다. 물론 우리 빌라에서 말이다. 참으로 하루에 무언가 약속이 있다는 게 새삼 기쁘기만 하다. 아무래도 집돌이도 아닌 내가 한 달 동안 섬안에서 박혀살았으니 근질근질할 만도 하지.
괜히 저녁에 파티를 한다는 생각에, 아침 먹은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급하게 파스타면을 삶았다. 아마도 뷔페 가기 전날 밤부터 벌써 뷔페에서 먹을 생각에 다음날 계획을 다 세워놓는 것처럼 말이다.
‘저녁 7-8시쯤이니깐 점심을 12시쯤 먹으면 배고파서 많이 먹을 수 있겠지?’
괜히 들떠서인지 면은 또 왜 이렇게 많이 삶았는지, 참말로 파스타면은 삶으면 삶을수록 많다. 경험이 많아질수록 더 고민하게 된다. 아니 이 정도면 외면 충분한지 알면서도 괜한 의심을 하게 된다. ‘조금만 더 넣자’ 그렇게 조금만을 두어 번 정도 하고 나면 2인분 이상의 파스타가 만들어진다. 어메이징 하지 않은가.
어제 만들고 남은 로제 소스에 야채만 설렁설렁 볶아내었다. 딱히 파스타가 좋아서 자주 해 먹기보단 극강의 가성비에 10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산더미같이 쌓인 파스타에 올리브 7조각이면 거뜬히 들어간다. 김치가 없으면 뭐라도 있으면 된다.
배가 남산만해질때쯔음 앤서니가 홍차 한 잔을 들곤 테라스로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언제쯤 파티 시작하냐고 물었더니, 9시 반이 넘어서 온단다.
“뭐라고? 왜 이렇게 늦는대… 그럴 줄 알았으면 지금 파스타 안 먹었지”
혼자 설레고 상상한 덕에 아침에 세워놓았던 철저한 내 계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코사무이 나들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왜냐고? 뭔가 간식할 거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무작정 오토바이를 끌고 몸을 이끌었다. 목적지는 해 질 녘에 간에 바닷가에 도착하는 것, 어디로 가든 겁낼 게 없으니 골목골목을 쏘아 다녔다. 코로나 틈에 대부분이 문을 닫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 그리고 그 사이에 가끔 열려있는 소품 숍을 찾아내는 것도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물론 단 하나의 소품 숍도 찾진 못했지만, 오늘이 아니었으면 들어가 보지 않았을 골목의 나의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늘에 조금씩 몸을 숨겨가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이젠 출발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잊지 않고 달달한 타이 밀크티 한 잔을 테이크아웃한다. 오랫동안 노을의 여운을 느끼려면 배고픔과 목마름 따위에게 관심을 뺏기면 안 된다. 그렇게 도착한 해변가, 조금씩 노을이 지고 있지만 태양은 아직 한창이라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다.
동네 아이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이리저리 바다 위를 활보하였고, 드문드문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자리를 채웠다. 이따금 바다에 비친 빛 위로 배 한 척이 지나갈 적엔, 괜히 멋진 사진첩이나 티브이 광고에서 볼법한 광경이 만들어졌다. 저기 저 배에 탄 사람들은 알까? 당신의 배 한 척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냈다는 걸 말이다.
조금씩 기운을 다해가는지 열기는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하늘에 여운을 남겨놓기 시작했다. 주황빛으로 점점 물들어가며 점점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뻘건색으로 어떻게든 조금 더 하늘에 자신의 존재를 남겨놓으려는 듯, 더 새빨갛게 말이다.
그 노력을 알아주는지 하늘도 답하기 시작했다. 쉽게 내어주지 않았던 새 파란색들이 조금씩 따라 변해간다. 어쩔 땐 핑크 같기도 보라색 같기도 한 이 오묘한 색깔의 하늘 앞에 넋 놓고 바라보는 외국인 두 명이 앉아있었다. 가끔은 서로를 보며 웃기도, 열심히 사진을 찍기도, 어깨에 기대어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 커플은 뒷모습으로도 행복의 여운을 내뿜었다. 아마도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까닭은 함께 물들어서였을까. 저 태양의 빛처럼 새빨갛게 말이야.
오늘의 바비큐 파티는 조금 새로우면서도 신기한 경험이다. 오리지널 코리안 바비큐를 맛보겠다며 재래식 된장까지 카트에 담았다. 물론 김치가 빠지면 섭섭하지만, 현지인 친구 퀀트다가 두 팩이나 구했다며 가져온다고 했다. 거기에 상추까지
‘너네 오늘 전부 다 코리아에 빠져 허우적대겠구나’
나름의 사명감을 갖곤, 재료 손질을 시작했다. 닭다리 12개, 삼겹살 두 덩이, 소고기까지 소금에 후추에 구석구석 틈 없이 뿌려주었다. 그리곤 된장에 양파와 고추 그리고 조금의 맥주를 넣어 걸쭉한 쌈장 소스를 만들어냈다. 이건 뭐 옛날 엄마 어깨너머로 쌈장을 만들던 장면을 기억해낸 거다.
마늘, 김치, 쌈장 소스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나둘씩 테라스로 모여들기 시작하며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파티를 시작했다. 한국인 셰프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모두가 움직였다. 자리에 닭 다리와 양파 한 덩이씩, 그리고 맥주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을 거다. 마크와 앤서니 셋일 땐 뭐 나이프도 필요 없이 한 손엔 닭다리 한 손엔 맥주를 들고 시작했지만, 특별히 오늘은 다들 점잖게 포크와 나이프로 약간의 격식을 차렸다.
그 와중엔 포크가 불편하다며 젓가락을 집어 든 스코틀랜드의 점잖은 한 쌈을 보아라. 어울리지 않게 작은 상추 위로 언밸런스한 커다란 삼겹살을 올린 뒤 쌈장 소스에 고추 몇 덩이를 더 얹는 이 센스. 이미 한국인 패치 완료이다.
가족끼리는 쌈을 서로 싸준다고 하니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오빠’를 외치며 스윗한 눈빛으로 다가온다. 오글거림을 뒤로하고 서로 쌈을 주고받았다.
‘넌 이제 한국인 다 됐어 짜샤’
이 모든 게 신기한지 다들 배꼽을 잡고 웃을 뿐이다. 하루에 맥주 한 병만 마시기로 했던 나와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벌써 빈병이 수두룩했다. 모든 게 감사했다. 한국요리를 대접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준 것도, 저 멀리 바다 건너온 남모를 친구들에게 가족처럼 챙겨주는 퀀트 다와 프리다도, 그리고 영어를 조금이라도 알아들어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테라스로는 결코 끝나지 않은 파티였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정리한 뒤 하나 둘 풀장으로 맥주를 들고 내려갔다. 거기에 프리다의 깜짝 선물까지. 태국에서도 남부 지방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맛 파이’란다. 껍질을 꺼내면 망고스틴처럼 생긴 알맹이가 있고 사실 맛도 비슷하다. 어찌나 내 스타일인지 몇 개씩 집어먹다 아예 줄기 채 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밤은 사실 끝날 줄 몰랐다. 2층에서 다이빙을 하던 마크, 몽키매직 노래에 맞춰 괴상한 춤을 추던 앤서니, 맥주에 얼음을 타 먹는 두 소녀까지, 눈꺼풀에 어둠이 내려앉아 더 이상 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없게 돼서야 일어났다. (아! 역시나 또 어떻게 한번 해보려는 제스퍼도 있었다. )
잠들기 전까지 여운에 사로잡힌 난,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오늘을 쉽게 지나쳐버리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