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역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국 사람을 두 명인가 만났었다. 그중 한 사람은 그 당시 50대 한국의 평범한 아버지였다. 그는 한국에서 사춘기 아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삶이 너무 힘들어 깨달음을 얻으러 산티아고를 걷고 있다고 했다.
걸음 속도가 비슷한지라, 한 서너 번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났다. 열흘 정도 뒤에 만났던 그는, 얼굴이 한결 밝아져서 신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이 무거운 배낭을 지고 하루 걷는 것도 너무 힘들었노라고. 그런데 열흘 정도 해보니 이건 정말 값어치가 있다고. 너무너무 훌륭한 경험이라서 당장 한국에 가면 내 아들 등에 배낭을 얹어주고 당장 비행기 티켓부터 끊을 작정이라고. 그리고 아들을 이 길로 보낼 거라고. 그 아이도 지금 자신이 얻고 있는 깨달음을 똑같이 얻게 하기 위해서.
난 그 얘기를 듣고, 그의 이 '숭고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아들과의 갈등에 기름을 들이부을까 염려되었다.
아들에게는 산티아고 길이 필요 없을 수도 있잖아요?
그 아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산티아고 길이 아니라 아버지의 열린 귀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으나, 예상대로 그는 귀를 닫고 있었다. 곧이어 옆에 와 앉은 독일인에게도 똑같이 이야기했다. 난 내 아들에게 이 값진 경험을 일부러라도 꼭 시킬 거라고. 그 앤 이걸 꼭 경험하고 깨달아야 한다고. 그리고는 "같은 경험이라고 느끼는 게 똑같을까?" 다소 의아해하는 그 독일인의 표정에다 대고 "나는 아버지니까 그 애에게 지금 필요한 걸 안다"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아쉽게도, '그 무거운 배낭과 뜻깊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사춘기 아들의 것이 아니라 50대 아버지 그 자신의 것이다. 아들에게는 어떠한 배낭과 어떠한 순례길로 남을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 사춘기 아이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선택을 강요받은 길이라면 그리 감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가 대신 판단하고 선택하여 책임져야 할 시기도 있지만(아이가 어릴 때), 사춘기라면 판단과 선택은 아이가 시작하고, 부모는 그 책임을 뒤에서 감당해 주는 병풍막이 역할로 물러섬으로써 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권'을 열어주기 시작해야 하는 시기다. (그래서 사춘기 아이 키우기가 재미가 없는 것 같다. 선택은 아이가 하고 감당은 부모가 해야 하니..)
사춘기가 시작되면, 아이는 자신의 선택하는 능력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기 시작한다. 그때 부모는 아이 뒤에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 주는 병풍으로 한 발짝 물러나야 한다.
우리는 보통 우리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좋을 것이라 짐작한다.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라는 황금률은 숭고한 가치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을 완전한 진실로 여기기 위해서는 섬세한 전제가 필요하다.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며, 상대방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결정을 스스로 내리고 있는 중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 섬세한 살핌이 결여된 어설픈 황금률은 독선, 즉, 우연히 경험한 자신의 체험이 '자신에게만 최선일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최선이어야 한다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걸음마 아기에게 줄넘기를 선물해 봤자 소용없다.
청소년에게 가장 좋은 틀니를 선물해 봤자 소용없다.
지팡이 짚은 노인에게는 아무리 비싼 러닝머신도 무용지물이다.
사자에게 풀을 뜯어 주고,
소 앞에 고기를 놓아주고는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한다
이래서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 된다. 황금률이 독선이 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 하나는 너와 나는 다른 욕구와 필요를 가질 수 있는 개별적인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는 능력. 즉, 자신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인지할 수 있는 '한계구분능력'이다. 또 하나는 상대가 사자인지 소인지 새인지 애벌레인지 분별할 수 있는, 자신 앞에 놓인 상대를 왜곡 없이 '바르게 보는 눈'이다.
황금률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자신과 타인이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과 상대의 현재 상태를 바르게 보는 왜곡되지 않은 눈이 필요하다.
성장은 본인이 성장하기로 결정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며, 변화는 본인에게 필요할 때 선택하는 것이다. 강제로 되지 않는다. 누구나 성장과 변화의 시기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때'를 위해 부모는 그 아이를 곁에서 섬세하게 관찰하며, 가장 가까운 하나의 'reference' 로서 아이의 곁에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물가에 말을 끌고 갈 수는 있으나,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
세상을 많은 책들로 이뤄진 넓은 도서관이라 생각해 본다면, '부모'는 아이의 곁에 가장 가깝게 놓인 책이다. 아이가 그 넓은 도서관에서 아직 '부모'라는 책 밖에 읽은 게 없다면, 그게 삶의 전부인 줄 알 것이다. 머리가 커서 다른 책들에게도 흥미가 간다면 잠시 자리를 떠나 다른 책들을 이것저것 집어 펴 볼 것이다. 그리고 그 도서관 책들 중 그래도 '부모'라는 책이 나아 보이는 지점에 돌아와서는 그 내용을 택할 것이고, 아닌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책을 참조할 것이다. 부모가 자신이 아닌 다른 책을 읽고 선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금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그 아이는 세상의 여러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유니크한 "모자이크 도서"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부모는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 중 한 권의 책으로서, 아이의 손 닿을 만큼 가까이에, 아이에게 너무 해롭지 않도록, 그저 자신이 뿜을 수 있는 최고의 매력을 뽐내며 존재하면 된다. 아이가 세상의 책들을 맘껏 맛보도록 격려하고, 그 아이가 하는 선택들을 열렬히 응원하면서.
부모는 아이가 '부모'이라는 책을 선택하기를 바랄 뿐, 요구할 수는 없다.
선택은 아이의 몫이다.
나는 그 도서관의 많은 책들 중 '살아 움직이며 자신과 대화하는 신기한 책'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런 책이 내겐 가장 재미있었으니까. 하지만 또 아이는 모를 일이다. 그런 책을 재밌어할지. 이게 내 부모관이다.
물론 현재 내가 그런 부모라는 게 아니고, 열심히 그쪽으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