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이들이 평소처럼 신나게 놀다가 아파트 단지 화단에 죽어 있는 새를 보고 너무 놀라 달려왔다. 머리만 없다 해서 이상해서 가보니, 야생동물과 싸우다 그런건지 어찌된건지 그 모습이 살짝 괴기스러웠다. 아이들은 충격을 받았는지 막내는 엄마 옆에 꼭 붙어잤고, 둘째는 새가 찢어지는 악몽을 꿨다며 새벽부터 일어났다. 어제부터 아이들은 '죽어버린 머리 없는 새' 이야기를 계속 하며 무섭다고 나를 쫓아다녔다.
심리검사의 일종인 <문장완성검사> 에는 이런 문항이 있다.
남들이 모르는 내가 가진 두려움은.........
이렇게 이 문장의 뒤를 채우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심리검사를 실시할 때마다, 나도 거기에 적힌 문항들에 답해보곤 했었는데, 다른 문항에 대한 답들은 그때그때 바뀐 반면, 이 문항에 대한 답은 항상 같았다. 그리고 유독 이 문항에 대답도 하기 싫었다. 많은 에너지가 이 문장의 답에 소모되고 있다는 뜻이다.
남들이 모르는 내가 가진 두려움은..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을
어느 순간 갑자기 잃게 되는 것이다.
어린시절 나의 삶에서 중요한 존재였던 오빠가 죽으면서 가족 모두 힘겨운 시간들을 보냈던 내 경험에서 비롯된 아픔과 고통이기도 하기에, 그 문장을 읽기만 해도 그 질문이 주는 고통감은 상당했다. 그리고, 이런 깊은 두려움은 내 인생에 소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거부'와 '밀어내기'의 묘한 긴장감을 유발시켜왔었다.
진심으로 좋아하고 관심이 있지만, 깊은 관계를 맺기도 전에 두려워하는 것이다. 깊은 관계를 맺어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 사람을 잃었을 때의 고통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여 피하고자 함이다. 그 사람을 잃게 되는 이유는 '내가 보잘것 없어서' 라는 보이지 않는 뿌리깊은 믿음일 수도 있고, 나의 경우처럼 물리적인 이별로 인한 고통에 대한 경험에서 올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여러가지 이유일 수도 있고.
이런 '유기'와 관련된 감정은 깊은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욕구를 감지하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서게 만든다. 그렇게 왔다 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실제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진짜 '지금의 순간'을 놓쳐버리게 된다.
나는 이런 두려움을 매일 마주한다. 아이가 너무 예쁘거나 사랑스러울 때, 문득 이 아이를 잃게 될까 두렵다. 신랑과 누워 밤늦게 속닥속닥 거리며 그래도 이런저런 일 같이 다 겪은 절친같다 친근감이 느껴질 때, 문득 이 사람과 언젠가 헤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두렵다. 마음이 가장 행복한 그 순간, 순간에 머물지 못하고 저 멀리 어딘가의 '미래'로 날아가 닥치지도 않은 가상현실 앞에 나를 떨어뜨리곤 한다. 그것이 트라우마가 가진 '허구를 현실로 체험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소중한 게 가장 많을 수록,
역설적으로 가장 두렵다.
내가 두려움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은, 내 그런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또 순간의 현실에서 벗어나 달아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지금 어딘가의 가상의 미래로 날아가 공포체험을 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자연스레 흘려 보내버리기 위해, 내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현재의 순간을 느끼려 오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완벽해 보이는 이 순간들도 언젠가는 곧 '깨질'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국,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금 내 앞에 놓인 그 소중함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일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내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그 유리잔은 미래 언제인가에 '이미' 깨졌다.
지금 필요한 건 지금은 아직은 온전한 그 유리잔을 느끼는 일 뿐이다.
이런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마크 앱스타인의 책에서 봤던 글이. (불교사상을 치료에 접목시킨 정신과의사). 우리는 모두가 지금 현재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언젠가는 죽게 되며, 언젠가는 서로 헤어지게 된다는 한 가지의 확실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내가 지금 물을 마시고 있는 이 유리잔은 먼 미래 언젠가에 '이미' 깨어졌음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지금 온전한 그 유리잔을 최대한 관심있게 느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알지만 어려운 일, 매 순간 내 삶의 순간순간에 온 정신을 모아 몰입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러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일.
트라우마에 직면했을 때, 그것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고 그것에 몰입하려는 노력까지 모두 포기할 때, 비로소 기대하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일어난다. 아기와 엄마의 유대와 비슷한 관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다. 황금 바람이 불어온다. -책, 마크 앱스타인 <트라우마 사용설명서> 중
잊고 있던 내 두려움과 다시 마주하는 순간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의 두려움과 나의 두려움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봐주는 거 밖에 없다. 벗어나려고도 극복하려고도 애쓰지 않고 그냥 그대로.. 그 감정이 거기 그렇게 있어도 된다고 허락한 채로.
#보아주어야흘러간다
#트라우마와두려움
#마크앱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