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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드 깜포스텔라

깨달음은 그 길에 없었다.

by 파랑새의숲

산티아고 드 깜포스텔라. 그 길을 꼬박 한 달을 하루종일 걸었다.

모르겠다. 요즘은 한국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지금 그 길을 걷게 되면 어떤 느낌 인지 잘 모르겠지만, 13년 전의 그 길은 참 외롭고도 다정했다.


사람들이 그 길이 꼭 '인생 같다'라고 했는데, 그 당시 떠나 꼬박 한 달을 터벅터벅 걷고 나니 그 말 뜻을 이해했었다. 그 길을 걷고 나서 나는 무엇이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현실로 돌아가야 했고, 그 현실은 '산티아고 길'이 아닌 것만이 분명하다는 것이 나의 깨달음이었다면 깨달음이었을까?


그 길이 특별한 건 아니었다. 아니, 그러면서도 무척 특이했다.

나는 사실, 그 당시에 이 길을 걸으면 마치 부처처럼 한 달 내에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다.

그 당시 책을 냈던 사람들처럼, 이 길을 걸으면 무언가 내 삶에 확실한 '답' 같은 것을 얻을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티아고 중간 어딘가 즈음에서 꿈을 꿨다. 어떤 목소리가 무척 선명하게 내게 말했었다.


너의 답은 이 길 끝에 없다.
길 위에 있을 것이니,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기를.


일어나서 이 꿈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길이 내 삶의 어떤 '깨달음'이자 '완전한 치유'를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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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달 내내 이런 아름다운 길들만한 달 내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리고 기대했다.

이런 길이 아닌 척박한 길이 나오면 그래서 이내 실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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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 달 내내 펼쳐지고 , 나는 계속해서 감탄만 하면서 치유되고 힐링되며 그렇게 삶이 순조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여행이 될 줄 알았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그랬겠지만, 그것은 내 내면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 '외부의 환경'이 아름답고 평온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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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계속해서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켜놓고 안내해 주는 것처럼, 안전하고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경험하는 것. 나는 그저, 저 노란색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는 가장 쉬운 여행이었다. 그것조차 중간에 노란색 화살표가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 난리가 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이 있음에도 걷지 못하고, 사람들이 있음에도 물어볼 엄두조차 잘 내지 못하며 길이 내 앞에서 끊긴 것처럼 난리를 피우며 혼돈에 잠시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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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온화한 순례길 위의 사람들.

나를 보면 말을 걸어주고, 걱정해 주고 내 생명과 건강을 걱정해 주는 그 사람들.

모든 사람들이 이처럼 다정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점에 대해 이상하게 개탄했다. 왜 현실의 사람들은 그리 악독한 사람들도 있고 평화롭지 않은가에 대해 스스로 의아해했다. 나 자신조차도 그랬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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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씨와, 풍경들,

그리고 신비로운 자연들.

이런 환경을 누리고 있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내가 가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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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친근하게 달려드는 동물들과 대화하고, 온기를 나누고

이곳에 정말 천국이자, 힐링이 길이며 진짜 삶이라고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내가 여행을 미화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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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노란색 화살표'를 잃어버렸다. 중간에 끊기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패닉에 휩싸여 어디로 갈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 서서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많아 이런 기분을 느끼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나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 지구에 혼자 떨어진 그런 외톨이가 된 느낌으로 서서 운 적도 있다.


난 어디로 가야 해?
난 여기서 완전한 이방인인데, 어디로 가야 사람들과 마을이 나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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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한 번은 죽을뻔한 적도 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30킬로미터 간격에 상점이 한 군데도 없었다. 8월 스페인 북부의 날씨로 나는 타 죽을 뻔했을 거다. 그때, 누군가가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너는 물이 꼭 필요하다면서 내 배낭 옆에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넣어주었던 기억이 있다. 중간에 돌 산을 오르면서 나는 느꼈다.


그 사람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 탈진해서 죽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만큼, 지나가는 사람도 없이 하루 종일을 나 혼자 걸었던 날도 있다. 저 돌산과 태양과 싸우면서 말이다.

한 명도 만나지 못해서 내 생각에 침잠하여 내 과거와 홀로 싸웠다.

온갖 기억들이 다 기어 나와서 나를 괴롭히고 , 내 생각들과 싸웠다.

그래서 나는 걷는 내내 겉으로는 터벅터벅 걷는 여행자였으나, 내면은 누구보다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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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은, 하루 종일 이런 비석만 나오는 길도 있었다. 1미터 간격으로 비석이 꽂혀 있는데 미칠 노릇이었다. 할 일이 없으니, 또 나의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다. 걸어갈 만하면 나타나고, 뒤쳐질만하면 나를 앞서가는 비석에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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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다가온 날, 배가 너무 고파 죽을 것 같던 길에서 마지막에 내 앞에 성벽처럼 들이닥친 계단.

난 이 계단 앞에서 헛웃음을 지으면서 혼자 널브러졌던 것 같다.

죽을까 봐 옆의 배낭에 꽂아놓았던 딱딱한 바게트 빵을 뜯어먹으면서 결국은 기운을 내서 저 계단을 오르기는 했지만, 정말 눈물의 빵인 것처럼 너무너무 힘들게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랐었다.


아. 집에 가고 싶다.


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던 그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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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닮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길의 끝 무렵에서야 이해했다.


아름답지만, 아름답지만은 않고

다정하지만, 다정하지만은 않고

다채롭지만, 다채롭지만은 않고

예측할 수 있되, 예측을 매번 벗어나는

그 길은 산티아고였다.


그 길에서 배운 한 가지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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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그 길 위에 있지 않다.
너의 매일매일의 현실 위에 있다.
어디론가 떠난다고 해서 힐링이나 깨달음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달콤한 도피일 뿐이다.
너의 삶의 진실과 깨달음은,
너의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 위에 있다.


4개월을 집에서 가장 먼 곳을 돌고 돌아 내가 먼 이국 땅에서 깨달은 현실이자 가장 깊은 깨달음이었다.


#퇴사여행기

#유럽여행기

#산티아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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